대기 지옥에 빠져도 상관없는데
'의사 손바꿈' 처음에는 이게 뭔가 했지만 내용의 흐름을 읽다 보니 의미는 간단했다. 원래 진료를 받는 의사가 아닌 다른 의사로 바꾸는 것. 전원을 하든 같은 병원에서 바꾸든 단지 의사를 바꾸는 바꾸는 일을 의사 손바꿈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땐 이런 말도 있구나 하고 넘겼지만 그게 나한테 해당이 될 줄은 몰랐다.
"혹시 원장님은 바꿔도 되나요?"
"네, 원하시면 다음에 접수하실 때 말씀 해주시면 돼요."
간호사는 쿨하게 대답했다. 워낙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행여 자신의 맡는 의사라도 막을 의무는 없으니까. 인기 많은 원장님으로 변경하기 위해 나는 다른 날보다 더더더 일찍 출발을 했다. 그럼에도 앞에 있던 대기 환자를 보며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와 이건 진짜다. 나도 이제 시작인가.
전보다 긴 대기 지옥이라도 성공을 생각하면 상관은 없었지만 마음을 그리 편하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나에 대한 배려보다 남에 대한 배려를 더 하는 편이었다.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조금 힘들더라도, 조금 바쁘더라도 남의 의견이 먼저였다. 예를 들어, 뭘 좋아하는지 선택권이 주어지면 대부분 먼저 한 적이 없을 만큼.
시험관이 아니었다면 절대 의사 손바꿈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마지막 관문이라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친구나 언니가 권했던 인기 많은 원장님을 선택하지 않고 그대로 시험관을 해서 성공하지 못했을 때 이어질 뒤늦은 미련이 따라오는 게 싫어서. 나는 이 시도가 마지막이고 싶은데 내가 아닌 같은 곳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의 입장을 생각하기엔 임신에 대한 간절함이 더 컸다. 그래서 한 결정이었다. 남의 입장이고 뭐고 지금은 내가 임신을 성공하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
"아, 저 원장님도 시험관 잘하시는데."
무한 대기 끝에 처음 얼굴을 마주한 인기 많은 원장님은 고개를 숙이며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러한 모습이 싫어서 고민을 한 건데. 내 잘못은 아닌데 내가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의사를 변경한 이유를 늘어뜨려 놓는 것밖에 없었다.
"일하고 있을 때는 시간이 맞지 않아서 원장님께 오지 못 했어요, 저는 임신을 기다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대기가 긴 만큼 잘하신다고 하시니까 시험관은 원장님께 하고 싶었어요."
단지 원하는 사람에게 진료를 받으러 온 건데 왜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고 있나. 금지된 일도 아닌데. 순간 현타가 왔지만 여기서 나갈 수는 없었다. 다른 병원을 옮길 생각까진 없으니까. 시험관과 인공수정의 확률을 운운하며 나를 설득하려는 의사에게 나는 바꾼 일에 대한 사과를 전했다. 절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래도 저한테 진료 받으시겠어요?"
"네, 원장님께 받을게요."
"그럼 이왕 결정을 하셨으니 최선을 다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불편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지만 의사가 말하는 대로 나는 고분고분하게 말을 따랐다. 초음파도 제법 친절하게 봐주고 시험관에 대한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바로 시작을 할 수 있나 싶었으나 이전에 인공수정을 연달아한 게 문제였다. 작아서 터지지 않고 남은 난포를 '물혹'이라 하는데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해야 밸런스가 맞아 난자를 많이 채취할 수 있다고 했다.
"우선 피임약을 이주정도 먹어보고 나서 봐야 될 것 같아요."
마음먹은 김에 바로 시작하고 싶었는데 이것마저 따라주지 않으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마음먹고 의사도 바꿨는데 이주나 더 밀리다니, 피임약도 난생처음 먹는데. 기운은 빠졌지만 알아서 잘 처방을 해주리라 믿고 당분간 편하게 즐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시험관 시작하게 되면 제한되는 것들이 많으니까.
"여보, 나 잠시동안 자유야!"
임신 굴레에서 벗어난 시간, 나는 자유에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