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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Feb 04. 2024

008. 슬픔은 그렇게 또 다른 위로가 되고.

도덕감정론 3

이른 새벽 택배하러 가는 차 안에서 아내가 말했다.

가슴속 깊이 웅크리고 있던 작은 소녀에 관한 이야기였다. 소녀는 애착상태에 빠있었고 가족에게 그런 감정을 숨기려 홀로 애썼다. 외롭기도 하고 서글펐 순간들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던 슬픔들이 서로에게 하나씩 꺼내지고 공감되며 우리는 가까워한층 더 친밀해져 갔다.


외롭고 힘겨웠 영혼끼리 기꺼이 어깨를 내밀고 등 내어준다. 같은 감정으로 느끼며 바라본다는 동감이란 말은 슬픈 감정에게 훨씬 더 적합하다는 애덤 스미스의 말은 옳은 것 같다.


동감(同感)이라는 말은 그 가장 적절하고 본래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의 기쁨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동류의식(同類意識)을 나타내는 것이다.


택배노동현장은 보람도 있지만 힘겨움과 서글픔도 한껏 넘치는 곳이다. 시린 추위 속에서 장시간 시달리다가 잠시 쬐며 느끼는 난로 곁의 따스함이란 편안하게 집안이나 사무실에서 느끼 그것과 사뭇 다르다. 날서린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시달 우울하던 중에 우연스레 마주친 친절한 이들의 작은 배려가 얼마나 살갑게 감동스레 와닿는지 아무도 모른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무심하게 지나치던 우리 일상 속의 수많은 빛나는 것들을 다시금 되찾고 발견하게 해주는 마력을 지닌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슬픔을 공감하는 것 부담스러워한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비애(悲哀)보다는 환희(歡喜)에 대해 더 많이 동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재부는 과시하고 빈궁은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허영(虛榮)이다. 그러나 허영이란 항상 자신이 주위로부터 주목을 받고 시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그래서 오늘도 밝고 재미있고 화려한 것들을 부지런히 SNS에 올리고 허영을 소재삼아 글을 쓰려 애쓴다. 허영은 허영을 부추기고 그 허영에 부러움의 탄식과 시기심의 불꽃이 넘실거리다가 종국에는 상처를 주고받는 허무한 챗바퀴만 돌린다. 




반면에 견디기 힘든 재난이나 시련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탄에 사람들은 시기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슬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의 감수성 결핍을 자책하며 마치 동감하는 것처럼 꾸미려고 애쓰노력한다. 간혹 슬픔을 딛고 이겨내려 애쓰는 시도들이 있다면 영웅적인 관대함으로 갈채와 감탄하는 경향이 크다. 슬픔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시기심과 질투심에 구애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표출할 수 있다고된 장점을 지녔다.


지만 슬픔은 우리의 가슴을 고통으로 응어리지게 만든다. 뭉쳐지고 짓이겨진 감정들이 심연 깊숙하게 가라앉아 쓰라리게 뒹군다. 바닥에 뒹구는 서글픈 감정덩어리들 끝자락에 낱풀린 서러움 한가닥씩을 뽑아 올려 한올씩 글로 풀어내어 본다. 슬픔과 외로움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고 가난한 작가의 글을 뿜어내는 원천이 되어준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이렇게 글 쓰는 손길을 움직이게 돕는다. 고독과 아픔이 스며있는 글들은 묘하게 위안을 준다. 그래서 굶주림과 갈한 고통이 피워 오르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뭇 생명을 살리는 깨달음이 열리고 누구의 눈길도 머물지 않는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랑이 탄생했나 보다. 


펄벅여사는 일 년 365일 눈앞에 펼쳐진 삭막한 붉은 흙더미를 바라보며  퓰리처문학상에 빛나는 대작 소설 <대지>를 완성했다. 삶 속에 매일 다른 얼굴로 다가서는 슬프고 우울한 감정은 우리로 또 다른 무언가를 창조하고 만들어내기를 시도하라는 인생의 시그널은 아닐까 싶어지는 그런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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