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힘들지만 홀로감내해야 하는 의무처럼 여겨졌던 일에 대한 고정관념이 가족과 함께 일하면서 크게 바뀌었다. 일하는 방식도 머리가 아닌 몸을 의지하는 육체적인 노동일인 택배를 하면서 '일의 의미'에 대해서참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 때문에 매일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 하는 일을 통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우리는 그저 물질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동물"이기에 일 속에 담긴 의미에그토록 집착하는건아닌지 모르겠다.
아마도 일 속에서 건져 올린의미라는 수레박 속에서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을 이유와 끝까지 밀고 나갈의욕을 찾을 수있으리라는 일말의기대와희망 때문이리라.
과연 우리가 하는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그런 의문을 뒤로한 채 아내와 함께 나는오늘도택배 하러 나간다.
택배레일이 가동되는오전 7시부터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하지만 택배센터에는이미 수많은 손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전의 메가허브물류센터, 동서울 물류센터 등에서 상품을 그득하니 실은 채 밤새워 달려온 거대한 20톤 간선차량들이거친 시동소리를 토해내며 도크에정차해서가쁜 숨을 고른다. 양쪽으로 활짝 개방된컨테이너 뒷문으로 오늘 배송될상품들이 빼곡하게 쌓여 금방이라도쏟아져 내릴것만 같다.
밤잠을 설친 간선차량 기사들이 종이커피 한잔으로 고단함을 달래거나 차량 뒷좌석에서 쪽잠을 자는 사이에상품하역을 담당하는 조업담당들이 휠소터를 가동하며이곳저곳을 점검하느라분주하다.
간선차량 컨테이너안에서하역작업을 할 외국인 노동자들이짝을 지어돌아가는 택배레일 위로 상품들을 내릴 준비를 한다.요란한 굉음과 함께 휠소터가 가동되면서 크고 작은상품들이 레일을 타고 쏟아진다.
숙련된 택배기사들은흘러오는 상품을 멀리서 보기만 해도 자신의 것인지금방 알아차린다.휠소터가 놓친 자신의 상품도 척척 잘도 골라낸다.다들 크고 무거운 상품들을 받아탑차 안으로옮기고쌓느라 분주하다. 그 와중에도 파손된 상품은 다시 재포장하거나 이런저런 고객의 문의 전화나 문자에도 능숙하게대응하는동료기사들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참 열심히 일한다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모두가 자신의 일에 몰입해서 바쁘게 일하는택배센터는레일이 돌아가는 순간부터이런저런 애환들은저 멀리밀쳐지고 그 자리에는 생생한 활기가넘쳐나게 채워진다. 이런 모습들을 가만히 지켜볼 때마다 좋은 직업의 조건에 대한 통속적인 관념들이속물스러웠다는 생각과 함께 그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느낌이든다.
사람들은 어찌 보면 단순히 직업을 통해 얻는 물질적 보상이나 보이는위세보다도 일 자체가 주는 재미를 더 높게 평가하는 성향이 더강한 것 같다. 일 속에는 "보상을 위해 접근하거나 경제적 위기를 피하기 위한 회피와는 무관한 더 깊이 있는 활동이 있다"는 글귀가새삼스레와닿는다.
일 속에 담긴 "깊이 있는 활동"이란 자신을 잊을 정도로 뭔가에 몰입할 때 찾아오는 <충만감>을 의미했다.
자신의 일에 깊이 몰입하는 사람들의 이런 상태와 감정적 희열을저명한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는'플로 flow'라고 명명한 이론으로 잘 해석하고설명해 준다.
플로란 어떤 활동에 완전히 몰입해 있다고 느끼는 최적의 상태다.
그 상태에서는 지루하지도 불안하지도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도 않는다.
플로에 들어가는 열쇠는 '어떤 활동의 결과로 나오는 보상이 아니라' 활동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배고픔이나 두려움 같은 불쾌한 조건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돈이나 지위나 명예와 같은 앞으로의 보상을 기대하려는 욕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계속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 없이도 며칠씩 쉬지 않고 일할 수도 있다.<이상 콰이어트 p265~266/수전 케인>
일이란 몰입하면서 얻는 즐거움을 맛보는데 그 의미가 있고 기쁨이 생겨난다.험난하고 힘겨운 삶의거친 상황들을 뚫어내고 계속해서 움직이게 만드는 저력이 그속에 담겨 있다.
육체노동인 택배를 하면서 아내와 새벽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배송을 마치는 순간까지의 시간들은 참 순식간에 지나갔다.
온몸에 근육통이 잔잔한 흔적으로 남지만 잡념이나 망상에 사로잡힐 틈이 전혀 없다. 오랜 기간 가족들과 호흡을 맞춰서인지 이젠 척척이다. 배송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서로의 역할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인다. 호흡이 잘 맞아 배송이 무난하게 진행되는 날이면은근한 자부심이, 쾌감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몰입해서 일하는 그 과정 속에서 만끽하는 충족감, 평안함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버텨낼 힘이 그렇게되어줬다.
하지만
이렇게 무수히 많은 손길들을 거쳐 고객들의 문 앞으로 상품이 배송된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모른다는 사실이,
그리고 삼, 사천 원하는 택배비에 이 모든 수고와 기쁨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가려지고 사라지는현실이 일하는 우리를 슬프게한다.
길을 걷다가 1억 원을 줍게 된다면 어떡할까.
너무 하고 싶은 게 많아. 이태리제 구두와 예쁜 옷에 시계 악어백 모두 사서 입고 차고 신고 할 거야.
<중략>
이 험한 세상 힘들지만 돈만 있으면 살만하구나.
어딜 가든 대접받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제발 꿈이면 깨지 마오.
이대로 살게 해 줘. 제발. <더 자두/1억 원 중에서.>
돈을 향한 사람들의 욕망은 참 애틋하다 못해 간절하다. 돈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하지만 돈이 지배하는 사회체계는 무관심을 확산시킨다. 신뢰가 없더라도 큰 문제없이 잘 굴러가는 경제체제에서는 오직 큰돈을 벌기 위한 것에만 관심을 치열하게쏟을 뿐이다. 몇백 원, 몇 천 원 하는 저렴한 상품시장을 놓고 1조 5천억, 3조를 투자한다는 알리와 쿠팡간의 불꽃 튀는 경쟁이 한창이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의미 없는 것을 판매할 때 가장 큰돈이 생기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걸까.
<일의 기쁨과 슬픔 p94 / 알랭 드 보통>
물류산업과 기업들이 돈을 많이 벌수록 택배기사를 포함한 물류 노동자들은 조직의 구조조정 대상인 일회용품으로전락했다. 잠자리에 들 늦은 시간과 휴일에도 택배일을 하며 점점 더해지는 노동강도로인한하소연이 진하게 담긴 택배기사의 글들이 택배소통카페 게시판에 점점 더 자주올라온다.
이러한 흐름들은 인간으로서의 중요성, 즉 남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시킨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역사는 있되 어려움을 공유한 이야기도 없고, 함께한 운명도 없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인간성은 점차 파괴되어 갈 뿐"이라고 지적했다.
누가 나를 필요로 하겠는가.
오늘날 '유연성 Flexible.'을 앞세워 무한한 자유와 기회를 표방하지만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책임에서 무한하게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고 있는 금융 자본주의의 일터 속에서 고통당하는 인간성에 대한 처절한 질문이다.
책임의식의 결여는 사람이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라는 반응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논리적인 반응이다. 소속감도 없고 의무감도 없이 그저 감흥 없이 일을 한다. 우리는 그렇게 가장 큰 낭비를 하는 세대를 살아간다.
모든 낭비 가운데 당신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낭비는 노동의 낭비다.
<존 러스킨/ 야생 올리브의 왕관 중에서>
고생시키는 남편이, 아버지가 미울 만도 할 텐데 아내와 아들은 껌딱지처럼 나와 늘 함께 하며 일한다.
때론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도, 가족이 함께하는 상황들이 빚어내는 갈등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충분히 덮어내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가족들이 나를 여전히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노안으로 작은 송장글씨가 보이지 않아 속상해하거나 침울해진 아내를 향해서, 그리고 이십 대의 시기에 이렇게 사는 게 옳은 삶일까 고민하며 안겨오는 감성 어린 아들에게서 나는 내가 여전히 필요한 존재임을 발견하고는나 역시 그들에게서 위로를 얻곤 한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험 매슬로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그것은 보기 드물고 얻기 힘든 심리적 성과"라고 했다. 삶의 의미란 거창한 것도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수록 내 앞에 주어진 일에 몰입하는 사실만으로도 가장 심리적 안정을 회복하며 힘겨운 인생을 살아내는 현명한 선택일 수도있겠다.
나는 오늘, 삶의 또 다른 이유를 발견하러 나의 가족과 함께 텃밭을 가꾸어내듯 또다시 일터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