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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Apr 21. 2024

비 오는 날 택배하며 느끼는 것들.

불편이 주는 의미.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우비를 챙겨 입고 배송에 나서는 순간 온몸이 불편하다. 축축하게 젖은 장갑의 불쾌감을 누른 채 배송을 나선다.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택배는 힘겹고 불편한 상황들고스란히 품고 있다. 불편은 고통이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하지만 힘겨운 택배현장 속에서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나게 한다."라는 글의 의미를 새삼 다시 느끼게 된.

군자는 무일(無逸, 편안하지 않음)에 처해야 한다.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해서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주공이 형인 무왕(武王)이 죽은 후 주나라 군주가 된 어린 조카 성왕(成王)에게 경계하며 한 말이다. 삶 속에서 경험하는 불편함 속에는 국가를 올바르게 통치하거나 한 인생을 올바르게 영위하기 위한 가치가 숨겨져 있음을 알수 있.


살아간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고 상처받는 것이기에, 고독한 산책자인 루소도 "인간들이나 운명이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자. 불편하지 않고 견디는 것을 배우자."라며 삶의 불편견뎌내 것으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있다고 다.


하지만 배란 불편을 느낄 틈도 없이 사람들의 결핍된 소비욕구들을 잽싸게 채워줘야만 하는 일이다. 택배기사는 시간과 존중의 결핍에 시달리며 일해야 한다.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서 누군가는 또 다른 결핍을 겪어야만 하는 현실이 참 웃프다.

 

요즘 들어 내가 배송하는 구역에 빈 상가들이 늘어간다. 배송하면 커피 한잔씩 챙겨주던 친절한 커피숍도, 힘겹게 상품을 가져다줘도 무뚝뚝하던 반찬가게도 다 문을 닫았다. 늘어가는 자영업자들의 빈 가게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피부에 와닿는다.


자본주의는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자본의 투자가 계획되고 관리되는 시스템이다. 공급과 수요를 결정하는 가격이 자유롭게 결정되는 시장경제는 이상적인 사람들의 바램속에 존재하는 이념일 수도 있다.


울리케 헤르만은 진정한 의미의 시장경제란 없다고 말한다. 시장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율성을 전제로 가동되는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의 개입이나 거대 기업들로 인해 계획되고 조정되는 시장만이 존재할뿐이다.


그리고  시장 속에서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 자영업자들에게 자유란 실종된 지 오래다. 그저 최저임금이나 입에 풀칠 할 정도의 수입에 대한 종속적인 수용만이 요구되고 있는 현실이다.


나 자신의 운명도, 나에 대한 평판도 모두 현대 사람의 의견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장자크 루소/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의 두 번째 산책 중에서>


이런 현실 속에서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갇혀 있다는 쓰리고 아픈 자각만이 남을 뿐이다.


이 느리고 공허한 시간 속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슬픔이 영혼에서 마음으로 치솟는다. 모든 것이 배가되는 감각이자 내림으로 바꿀 수 없는 외부적인 무엇이라는 쓰라린 자각이다.


배송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입주민과 함께 타면 먼저 내리게 하고 배송을 한다. 해당 층에 도착했으나 함께 탄 입주민이 우산을 안 가져왔다며 다시 내려가겠다고 한다. 내려가며 배송하려고 했더니 급하다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배송하려고 내렸더니 눌러놓은 층수 버튼을 모조리 지워버린 입주민의 행동에 황당했다는 어느 택배기사의 사연이 생각난다. 배송 중에 여러 통의 상품이 없다는 문자나 전화를 받고는 한다. 한결 같이 미안하거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말 한마디도  없이 찾았다는 말만 남긴 채 사라진다. 이젠 사람들의 이런 자기중심적인 반응이 무덤덤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 모두가 지나가지만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고 내 운명과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 운명자체와도 상관없다. 단지 무의식일 뿐이고 우연히 날아온 돌에 맞고 튀어나온 불평, 이해 못 할 목소리들의 메아리, 인생의 복합적인 뒤섞임일 뿐이다. <불안의 책/페르난두 페소아>

   

비 오는 날이라 들고 다니던 손수레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채 물끄러미 수레를 바라보는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비 오니깐 배송하기 더 힘들지요?"

의외의 따스한 배려의 한마디에 그만 경직되었던 마음이 무너져 내려버렸다. 엘리베이터를 내리던 나는 슴에 배려심을 가득히 담고 일하는 미화원 아주머니의 존재가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고 마냥 그런 그녀가 부러웠다.


을 윤택하게 만드는 자본이란  전부가 아니며 배려가 깃든  마음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겹고 결핍된 삶의 구석구석에서도 피어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아쉽게도 우리 일상의 관심 밖 저 멀리로 밀어냈만 지혜자들은 그것들이야 말로 진정한 삶의 가치라고 말한다.


가난하다는 핑계로 우리는 우리의 아들들에게 그것들을 자본으로 삼아 이 세상을 살아가라는 조언을 해주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자본주의도 결핍을 배경으로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찬란한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의 맨체스터도 가난한 산업도시였을 뿐이다. 결핍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살아갈 방향을 찾으며 삶의 모든 것을 자본 삼아 움직이게 만든다.


삶의 결핍을 받아 때 내 마음속에 생겨나는 근심스러운 평화와 체념으로 얻은 고요가 있다.

알 수 없이 몰아치는 삶의 바람결을 따라 섬세하게 유영하는 나비의 날개짓은 힘겹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자유롭고 우아하기만 할 뿐이다.


장 자크 루소는 고통의 감정과 쾌락의 관념은 욕망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욕망은 결핍을 전제하며,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결핍은 괴로운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불행은 우리의 욕망과 능력의 불균형에 있다."

 

는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은 "능력에 넘어서는 쓸모없는 욕망을 이는 것이며, 또 능력과 의지를 완전한 평등 속에 놓는 것"이 라고 했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나란 존재를 가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만 바라봐야 한다. 것이 루소가 추구하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노년인 그가 홀로 산책하며 자만심이라는 감정적 욕망을 다스리려 애쓰는 모습에서 삶의 거장도 피해 가지 못하는 인생의 험한 실상을 느끼게 된다.


나를 꼭 닮은 분신 같은 아들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반성과 애틋함을 번복하고

그런 나를 곁에서 빙그레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선물 같은 아내와 하루를 살아낸다.


늘 채워지지도 않고  보태주지도 않는 삶의 그릇 속에 오늘은 무엇을 보태서 이런 공허스러운 빈 여백을 메울지를 고민하며 사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또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


우리의 눈을 감기는 빛은 우리에겐 어두움에 불과하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날만이 동이 트는 것이다. 동이 틀 날이 또 있다. 태양은 단지 아침에 뜨는 별에 지나지 않는다. <월든 p476,477>


결핍은 불편하고 불행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우리의 정신을 깨어나게 한다. 사라지는 것들은 꼭 같이 한 가지 일을 한다. 각자 안에 살고 있는 제 존재들을 나눠주고는 가만히 사라져 갈 뿐이다.


나는 몸을 씻듯 삶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듯이 내 속의 생각들을 매일 새벽마다 갈아줘야 하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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