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삼촌 Jun 15. 2024

내 아내는 살아있는 <내비게이션>이랍니다.

선물같은 아내. 그리고 아름드리 한그루 남편

찌는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6월은 일 년 중 택배 물량이 가장 많은 달이다.


탕용기 같은 부피가 큰 짐들이 많이 나와 한번에 탑차에 다 실을 수가 없다.

요즘은 총알배송, 특급배송, 로켓배송 등등 당일배송에 대한 압박들워낙 심해져서 배송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부담이 한층 높아졌다.


가급적 부피가 큰 짐들과 몰짐들(한꺼번에 몰려서 온 대량의 상품들)은 후순위로 배송하거나 나눠서 순차적으로 배송하는 요령을 부릴 수밖에 없다.


성격 상 그날 해야 될 일은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지만

빨리 배송하고 가져다 달라는 독촉만 난무하는 택배현장에서 당일배송에 대한 책임감은 택배기사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는 허무한 일임을 체감할 뿐이다.


택배초기 일이 년 때는 아내와 자정까지도 이차, 삼차 배송을 하며 당일배송을 충실히 해냈지만

이젠 아내와 가족의 건강이 염려된다. 이제는 성실한 택배기사가 되고픈 마음을 버렸다.


그래야 내가 살고, 아내가 살고, 가족이 살기 때문이다.

택배현장에서는 그 누구도 택배기사가 밤새워 배송하다가 쓰러져도 염려해 주거나 보살펴줄 이 아무도 없다. 오로지 클릭 한 번의 주문과 당일배송 만이 유효한 룰일 뿐이다.


그저 택배기사는 스스로 알아서 챙기며 일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유일하게 나를 챙겨주는 존재가 있으니 어찌 눈물 나게 감사하지 않을까.


"30, 30이라고."

"60, 60이라고 몇 번 말해야 해."

"내가 먼저 양보하라고 했잖아.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야. 어쩌고 저쩌고."


내 옆좌석에서 단속카메라나 튀어나오는 차량을 발견할 때마다 바짝 긴장해서 터져 나오는 아내의 <내비게이션 잔소리>는 평범한 남성들이라면 결코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핸들을 쥔 남성이라면 성격이 온순하든 이성적이든 상관없이 대부분 야성적인 짐승모드가 되곤 한다. 예민한 운전상황에 노출되다 보면 쉽게 감정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외쳐대는 아내의 모습에서 그녀의 두려움이 먼저 보이기에 운전대를 쥔 야수의 본능마저 힘을 못쓰고 저만큼 사그라진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건 남편이 잘못되는 것이다.

그녀가 무서워하는 건 가족이 위험에 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늘 가냘프고 마음 약한 아내이지만 남편과 자식이 위험에 처하자 돌변했다.

언젠가 물류센터에서 배송하다가 물류센터 직원들과 시비가 붙어 나와 아들이 그들에게 거칠게 에워쌓이 가녀린 아내가 미친 여자처럼 고함을 질러댔다.

 

"내 남편 손대지 마. 내 아들 손대지 말라고."

 비명처럼 질러대는 아내의 외마디에 늑달같이 달려들던 무리들이 주춤하며 움츠렸다.

 

"엄마. 엄마 목청이 그렇게 크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네. 큭큭."

아들의 짓궂은 말장난에 아내는 머쓱해했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강해져. 누구도 내 남편, 내 아들 손 못대."

 

낄낄거리는 분위기였지만 왜 그리 코끝이 시큰거리는지.

 

아내는 내 곁에 늘 붙어 다니는 살아있는 비게이션이다.

내비게이션은 안전하고 빠른 길을 안내도 해주지만 전혀 색다른 위로도 준다.

  

길을 잘못 들어섰거나 다른 경로를 선택했을 때에라도 늘 감동적인 멘트를 날린다.

"경로를 이탈하여,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인생의 경로를 무수히 이탈하며 여기까지 왔다.

어찌하다 택배기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삶을 산다.


아내는 늘 내 곁에서 함께 경로를 재탐색해 주었다.

왜 남자는 여자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걸까.

현실적인 아내의 경고들을 얼마나 무시하고 이탈하며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무거운 짐을 쌓거나 나를 때 숨이 한아름 턱까지 차오를 때면

뒤늦게 형벌을 치르는 중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런 나 때문에 아내와 아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장이기에 느끼는 자책감에 시달리며 대가를 치르는 중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만큼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사실발견하는 행운도 다.


남편 밖에 모르는 아내와

부모 밖에 모르는 아들이 나에게 있다는

결코 하늘이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기 그감사할 수밖에 .


이번에는 행복해서 코끝이 시큰거린다.

아무래도 오십 년 된 의 깊은 조울증에 빠진 것 같다.


많이 쌓인 짐들이 부담스러워

아내와 새벽에 일찍 나가 새벽배송을 하기로 했다.


레일이 돌기 전에 서둘러서 한 시간가량 배송을 하고

다시 센타로 가는 길에 곁에서 아내가 홀가분한 듯 한마디 한다.


"새벽배송도 할만하네. 그지?"


나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속으로 아내를 욕하고 있었다.

바보멍충같아. 너란 존재는 도대체 니.

그리고 또 시큰거린다.


까대기 시간, 맘 속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삶의 잔상들이

쉬 사라질까 봐 짬짬이 스마트폰에 글을 담는 나를 보며 아내가 한마디 거든다.

"과하다. 과해."


부지런히 움직인 덕에 일찍 배송을 끝낸 우리는 산책을 하러 나왔다.

아내가 물끄러미 나무를 올려보고 있었다.


아내는 무엇을 그리 우러러 바라보고 있을까.

커다란 나무 아래 조그마한 아내가 가만히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저 참 눈물 나게 고마울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가 춤을 추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