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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삼촌 Jun 23. 2024

착한 아내가 욕을 배웠어요.

아직도 내 혀끝엔 돌이 맺혀났다.

아내는 학급 부반장이 몹시도  싫었다.


당시 학창 시절의 '반장', '부반장' 같은 학급임원이란 공부도 잘하고, 있는 집안 출신의 그룹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안이 부유하지도 않았고, 공부도 일, 이등을 다툴 정도로 그리 특출 나지 않은데 그 잘난 그룹 속에서, 잘난 체하며 살아야 상황 어린 아내에게  부담다.


과제로 제출해야 하는 일기장에 '부반장은 너무 부담스럽다'는 내용의 글을 하나 가득 써서 선생님께 제출했다. 그래도 끝까지 참고 해 줬으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답글이 되돌아왔다.


옷을 좋아하는 아빠 덕에 늘 입던 백화점 브랜드의 옷과 신발들.

그리고 간혹 열리는 학부모 초정행사에서 화사한 스타일의 엄마 옷차림은 은연중에 학급임원 자격이 충분함을 시선들에게서 묵과적으로 암시받았.


그렇게 어린 아내는 가정형편이라는 과 학급임원의 자격에 부합하는  사이에서 가녀린 자존심을 지키려는 작지만 치열한 삶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여러 차 임원부모님 호출에도 아내는 단 한 번도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동안 담임 선생님에게 미움을 받았다. 아무 말 없이 힘겨워하는 어린 딸을 살피던 부모님이 학교를 방문하고서야 모든 상황은 하게 마무리되었다.


아내는 종종 스스로를 '회색분자'라고 다.

자신이 상처받는 것이, 상대방이 상처 입는 것도 몹시나 싫었다.


희지도 검지도 않은 애매한 회색지대,

그곳에 머무는 순간 그 어느 누구도 상처받지 않았고 자신의 자존심도 지켜낼 수 있다고 여겨지면서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내는 가만히 하고 싶은 말, 원하는 감정을

그저 가슴속에 둔 채로 참고 살아왔다.


부모님, 형제들, 친구들. 직장동료들, 남편과 시댁.

그 어떠한 관계 속에서도 자신의 속감정을 애써 표현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착하디 했지만 가슴속 깊이 응어리지고 아팠다는 아내의 고백을 가만히 듣던 나는 그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앞으로 남편인 나에게는 어떠한 감정이나 말을 참지 말고 내뱉으며 살라고 말했다.

하고 착하던 아내는 그날 이후 진심을 다해 속감정에 충실하게 나를 대했다.

 

자유분방하게 날아드는 택배박스, 반말과 말방귀 등에 금방 장난 아니라는 아찔한 생각과 함께 급회가 생겨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잔이었다.

 

어느 휴일 모처럼 달콤한 낮잠에 빠졌다. 마나 잠들었을까. 에 취한 채 반쯤 눈을 떴다.

아내가 주방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늦은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행복했다.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녀는 무슨 노래를 부르는 걸까. 궁금해서 가만히 귀 기울여 들었다.

무슨 민요풍인 것 같기도 한데 그녀가 흥얼거리는 가삿말에 난 그만 화들짝 잠에 깨어버렸다.

  

"니미럴, 육시럴, 어쩌고 저쩌고..."




욕설은 상스럽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을 본능적으로 표현하는 지극히 감정적 언어라고 한다.


샤를 보들레르.

그는 19세기 문학적 자부심이 넘치던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아름다운 시구와 언어의 마술사이던 그도 노년에 뇌졸중에 걸려 실어증에 빠져 말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수녀원 병실에 입원한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말 때문에 그만 쫓겨나고 말았다.

"제기랄(Crenom)"이라는 상스러운 욕설 때문이었다.


욕설은 감정과 매우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사람이 언어능력을 상실해도 사람의 뇌 중에 변연계, 즉 본능적인 감정을 관장하는 부위를 민감하게 자극한다는 사실이 미국 뉴욕대 연구팀의 '자기 공명영상(fMRI)' 촬영에서도 입증이 되었다.

      

은 언어이지만 일종의 감정 표현이기 때문에 감성을 담당하는 뇌의 변연계가 활발히 활동해 피질에서 욕을 만들어낸다.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 조장희 소장>


언어학자 '멀리사 모어'는 그녀의 특이한 저서 <Holy Shit>에서 인간의 가장 깊숙한 감정을 고급하게든 저급하게든 표현한 단어들을 고대로마와 성서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탐사했다.


그녀의 결론은 '욕설'이라는 상소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언제나 늘 흥해왔다는 것과 '성스러움'과 '상스러움'은 그야말로 '한 끗차이'라는 사실이었다.


마도 설도 삶의 의미가 담긴 언어라는 뜻이리라.


그리고 욕설은 고통에 대한 <통각상실 효과>를 지녔다.

영국의 킬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리처드 스티븐슨'은 목공작업 중 내려친 망치에 손을 다쳤다.

손을 다치는 순간 욕설이 저도 모르게 나오면서 의문이 생겨났다.

'고통스러운 순간 왜 욕이 나올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욕이 도움이 될까.'


그는 얼음을 가득 담은 양동이에 손을 넣고 오래 견디는 실험을 통해서 욕설을 한 실험자들이 50% 더 고통을 견뎌낸다는 결를 발견했다.

  

택배현장은 욕설이 난무한다.

X새끼, 씨발.


듣기 힘든 을 '참 찰지게 한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흔하게 듣다 보니

택배초기에는 차마 아내를 택배 레일 곁에 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택배를 하면서 욕설도 듣지만

고상하게 인격을 모독하고 택배기사들의 신경을 거스르는 수많은 '진상짓'들을 겪으면서 왜 택배현장에 욕설이 난무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상소리는 고통이나 강렬한 부정적 감정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또한 다른 고상한 단어들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심하게 어그러진 불평등한 상황과 조건들을 참고 견뎌낼 여지를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설이란 우리 사회의 가장 힘이  약한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 견뎌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의지와 감정이 담긴 신음과도 같은 언어는 아닐까 하는 서글픈 각도 든다.

  



요즘 내가 푹 빠진 70대 가수인 '브루스 스프링스틴 Bruce Springsteen'이 담담히 말한다.

자신의 성질을 죽이는데 35년이 더 필요했다는 그의 고백은 매번 들을 때마다 가슴에 와닿는다.


'신념', '희망', '정직' 등은 사람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든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사랑'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삶 속에서 기적(Miracle)을 만들어낸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내뱉는 가식적인 '거짓말'들이 그런 '사랑'을 무너뜨리고 '기적'을 떠나보낸다고 노래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안에 돌이 가득했지.


너는 말했어.

그건 내가 했던 거짓말이라고.

내가 너에게 했던 거짓말이라고.


날이 밝고 난 침대 끝에 걸터앉아.

다시 돌들이 내 혀 끝에 생겨났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부른 'Stones'의 가사말 중에서 >


욕설의 상스러움 만큼이나 꼭 닮은

상대를 모욕하고 아프게 만드는 그런 거짓되고 가식적인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그런 우리 삶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날까 두려워 '문명화''고상함'으로 애써 감추고 포장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리는 은연중에 본심은 숨긴 채 가식적이고도 거짓된 말로 '관계의 지옥'을 만들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의 노랫말 가사처럼 날마다 뱉어내도 내 혀끝에 다시 돋아나는 돌들은 한없이 나를 낮아지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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