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상처를 비트(음악)로 감싸다.
낮게 내려앉은 회색빛 하늘은 지칠 줄 모르고 새하얀 빗줄기를 토해냈다. 보도블록 위로 하얗게 피어오른 물보라가 현실의 경계를 지우는 사이, 거칠게 내리 꽂히는 빗소리는 도시의 살아있는 소리들을 깡그리 집어삼켰다.
초록색 재활용 마대 입구까지 차오른 채 세찬 비를 맞은 종이박스들은 이미 제 몸을 지탱할 힘을 잃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소중했던 것을 단단히 간직했을 골판지는 수분을 이기지 못해 본래의 결을 잃어갔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겹겹의 판지는 층층이 벌어지며 흐느적거렸고, 끈적하게 녹아내린 접착제 사이로 종이 살점들이 힘없이 바닥으로 밀려 내려왔다.
이 거친 리듬의 빗줄기는 그저 누군가의 견고한 세계를 무너뜨리고 후벼 파 듯 점점 더 강하게 쏟아졌다. 마치 세상의 진실을 모두 지워버리기로 작정한 듯이.
"아니, 이게 뭐예요. 도대체 뭘 배달한 거예요?"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중년의 여성이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빗물에 젖어 형체가 허물어진 세제 박스가 아파트 현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젖은 작업복은 납처럼 무거워 살갗을 죄어왔고, 신발 속은 이미 늪처럼 질척이는 것을 느끼며 동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비가 너무 갑자기 쏟아져서... 안에 비닐 포장은 되어 있어 내용물은 괜찮을 겁니다."
"저는 안 괜찮아요, 이런 걸 어떻게 써요? 당장 도로 가져가고, 오늘 내로 새 제품 다시 보내세요. 안 그러면 본사에 정식으로 컴플레인 걸 거니까 그렇게 아시고요."
철커덕.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전자음과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동구는 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젖은 세제 박스를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젖은 박스 밑으로 동구의 신발에서 흘러나온 빗물이 흥건히 고여 들었다. 복도 바닥 아래로 서서히 꺼지는 듯한 느낌 속에 동구는 귓가에 들려오는 세찬 빗줄기 소리가 울음소리인지, 고함 소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없이 트럭 운전석으로 되돌아온 동구는 시동을 건 채 핸들 위에 가만히 머리를 숙였다. 와이퍼가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며칠 전의 잔인한 기억의 잔상은 지워지지 않은 채 또 다시 떠올랐다.
직접 가까이 마주한다는 설렘도 잠시, 그의 집무실에서 만난 나성결 목사는 강단 위의 성자(聖者) 같은 설교자가 아니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그의 손길은 품위 있었으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들은 싸늘했다.
"동구 군, 우리 교회 바닥을 덮은 대리석은 티끌 하나 결코 허용하지 않네. 언제나 거울처럼 맑고 깨끗해야 하지." 그는 먼지 하나 없이 빛나기까지 하는 자신의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동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자네가, 그 고결한 바닥에 흙발자국을 남기며 내 딸의 손목을 잡겠다고? 고졸에 택배나 하는 주제에. "
잠시 멈춘 뒤 나즈막히 내뱉는 그의 음성에는 노여움이 묻어 있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죄악이야. 거룩한 곳에 묻은 얼룩은 지우는 게 순리지."
침묵하는 하나님을 대신한다고 그를 철석같이 믿고 존경했었다. 그런 신의 대리인이 가장 잔인한 은유로 동구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있었다. 동구는 그때 깨달았다. 이 땅 위에서 구원이란, 결국 가진 자들이 쌓아 올린 성벽 안에서만 거행되는 성례이자, 잔치일 뿐이라고.
화려한 신의 대리인들 앞에선 가난하고 소박한 베들레헴의 마구간도, 가장 비천한 곳에서 빛나는 성스러움도 그저 신화에 불과했다. 애초부터 이 땅의 낮은 곳에는 진정한 구원이란 없었다.
나미리는 불이 꺼진 교회의 대형 기도실 맨 끝 좌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빠의 우렁찬 기도 소리가 성도들과 넓은 기도실을 뒤덮었지만, 그 소리는 미리의 마음속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학교 축제에서 조명 아래 비트에 맞춰 랩을 뱉어내던 동구 오빠. 그때 오빠는 누구보다 자유로웠고, 부모님 아래서 숨이 막혀있던 미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던 유일한 통로였다. 하지만 아빠는 오빠의 음악을 '소음'이라 멸시하고, 오빠를 '지워내야 할 얼룩'으로 취급했다.
주님, 이 땅 위에는 진정한 구원은 없나 봐요. 하늘과 가장 가깝다는 곳이 사실은 가장 높고 견고한 감옥이었다는 걸, 저는 이대로 영원히 아빠의 성벽 안에 갇혀서 살아야 하는 건가요.
심장이 아스팔트 위에서 산산조각 나는 아픔을 느끼며 미리는 어둠에 드리워진 교회 책상 위로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환하게 불이 켜진 택배 센터 지붕 위로 억수같이 비가 쏟아진다. 전달봉은 센터 화장실 거울 앞에 멈춰 섰다. 텅 빈 눈으로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입꼬리를 당기기 시작했다.
굳게 닫힌 입술 끝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며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 기괴하게 뒤틀린 끝에 완성된 그 미소는, 차라리 고통을 참아내려는 짐승의 일그러짐에 가까웠다. 그는 그렇게 몇 번이고 입꼬리를 고정하는 연습을 한 뒤에야 밖으로 나섰다.
"어이, 달봉이! 비 오는데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실실 웃어?"
"허허, 그러게요. 비가 시원해서 좋네요."
동료의 물음에 그는 습관처럼 매끄러운 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어린 시절 생모와 아버지가 악을 쓰며 싸우던 그 좁은 방에 멈춰 있었다. 더 이상 상처를 입는 것이 너무 무서워, 그는 웃음이라는 두꺼운 얼음 가면 뒤로 자신을 숨겨두었다.
폭우 속에서 달봉의 내면이 동구의 비트와 섞여 흐른다
죽어라 달렸지, 인생 앞에 붙어있는 값어치
애초에 나는 혼자였고, 알아줄 사람도 없었어
되돌리려 해도 이미 지나간 삶인걸...
밤이 깊어지자 빗소리는 더욱 묵직해졌다. 집하를 마치고 돌아온 동구의 탑차 안에 달봉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차창 밖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구야... 사실 나, 가끔 숨이 안 쉬어져. 웃고 있는데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기분, 너는 아냐?"
달봉의 눈에서 툭, 눈물이 떨어졌다. 늘 유쾌하던 형의 갑작스러운 오열은 택배차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보다 더 애처로웠다. 동구는 달봉의 떨리는 어깨 위로 가만히 손을 얹었다.
"형, 나도 잘 모르겠어. 진짜처럼 산다고 여겼는데 사람들은 항상 나보고 가짜처럼 산대. 그래서 나는 이제 남들의 조언 따위는 듣지도 않고 나만의 랩을 내뱉으며 살기로 했어."
동구는 스마트폰을 꺼내 자신이 만든 비트를 틀었다. 쿵, 팍. 쿵, 팍. 묵직한 킥과 날카로운 스네어가 좁은 탑차 안을 가득 채웠다.
"달봉이 형, 힘겨울 때 만든 이 비트 위에 나의 울음을 얹어보니까 그게 노래가 되더라. 슬픔에 슬픔이 더해질 때 치유하는 음악이 되는 건가봐."
가만히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두 사람 위로 비는 여전히 쏟아졌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비를 맞지 않았다. 아니, 비라는 리듬 속에 자신들을 던져 넣고 있었다.
동구의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루프(Loop) 비트는 빗소리와 섞여 묘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자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리듬이었다. 각자의 방에서 아파하던 영혼들이 '음악'이라는 '실'로 서로를 연결하고 얽매기 시작했다.
더 이상 빗줄기는 채찍이 아니었다. 그것은 힙합 공동체 "The Tree"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자, 가장 낮은 곳에서 터져 나올 찬란한 함성이었다.
그래서 난 음악 만들어, 스스로 위로하게
내가 알맞게 살아가는 삶이 맞다고 나는 늘 믿어
성공할 때까지 없을 거야 난 자만
삶의 끝자락에서 붙잡은 내 희망
I'm ready everyday.
https://youtu.be/9ZW47VJ6Ec4?si=AOUkKESQlML45zhe
#스포티파이 등 각종 음악앱에서 "핫네이버후드(Hotneighborhood)"를 치시고 깨끗한 음원으로 감상하세요.
[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