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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인문학
소소한 일상의 끝자락에서.
by
코나페소아
Oct 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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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택배를 한 이래로 가장 길었던 연휴도
이젠
불과 얼마 남지 않았다.
시월에 접어들면서 날씨는 완연하게 선선하다. 오늘은 여름철에 사용하던 선풍기들을
하나씩
정리해서 창고에 보관하기로 했다.
아내와 선풍기를 분리하고 세척하면서 금년 여름은 모진 더위와 기나긴 장마로 힘들었는데 곧 다가올 겨울과 내년 여름에는 혹시나 더 힘겹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당장 연휴가 끝난 후
감당해야
할 많은 물량에 대한 부담도 은근히 생겨났다.
우리는 항상 우리네 삶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기를 바라는 잘못된 습관을 지녔다.
원하는 대로
삶이 진행되기를 바라는 것보다 삶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사실은
더
현실적
인데 말이다.
원하는 대로
나의 삶이 진행되도록
통제하고픈 우리의 욕망은 과연 허망한 것일까.
사람들이 엄청난 부를 축척하고 주변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는 한 억만장자에게 성공한 비결을 물었다. 그때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서슴없이 대답했다.
"
사람들
은 특정한 원리로
통
제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에 몰두하지만,
저는
그 원리들이 작동하는 이유를 깨달으려고 애씁니다."
그는 특정한 원리가 작동하는 이유를 알고 나면,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삶의 여러 영역에도 그 이유를 적용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눈앞에서 작동하는 삶을 유심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인생의 사소한 것까지도
제대로 인식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했다.
그리고 인생의 사소한 것들 속에는 현실에서 1등과 2등을 가르는
실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아야 했다.
노키아 등에서 인간중심의 디자이너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얀 칩체이스'는 전 세계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미래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발견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사소한 일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영감을 얻고 이를 비즈니스에 성공적으로 적용할 유용한 정보를 만들고 세계 유수의 기업은 거액을 주고 기꺼이 그것들을 구매
했다.
그
는 사람은 항상
생존본능에 따라 행동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기업에서 제공한 제품이나 기술서비스를 기술디자이너의 당초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도구로 활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의 창발적인 역량은 그것이 필요한 상황과 여건에 처해야만 긴박하게
작동
한다. 이때 보여주는 인간의 행태를 세심하게
관찰하
여 새로운 제품의 디자인이나
비즈니스 기회를
포착했다.
새롭고도 혁신적인 발견은 생존본능적이고도 가장 단순함
속
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단순함이 옳은 것이지만 본질이 담긴 이유는 그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인도의 타타자동차는
차량기능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저소득층을 겨냥한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삼백만 원대 '타타 나노'(TaTa
Nano) 승용차를
출시한다. 하지만 충분한 구매여력을 가진 저소득층
들
도 그것을 외면 한 채 두 배나 더 비싼 '마루티 스즈키 알토'를 구매했다.
기업은 자동차를 소유한다는 것이 단지 바퀴 네 개와 엔진을 소유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동차 소유주가 됨으로써 사회적인 지위를
부여받는다 는
의미로
여기는 현실을 간과했다.
가난한 소비자들에 대한 오만한 편견에 빠지는 실수를 한 것이다.
단순함이 옳은 것이라면 본질을
찾는 것은 제대로 된 '현실직시'에 있
다.
삶의 본질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에 있다.
인생을 바꾸고 차이 나게 만드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늘
맞닥뜨
리는 사소하고 때로 구질구질해 보이는 현실 속에 살랑거리는 꼬리처럼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래서 삶은
언
제나
현실을
세심하게 살펴보고 수용하는
것에서부터
제대로 시작된다.
하지만
,
우리는 늘 우리
의
머릿속 생각
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멀리하고 고통을 스스로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길들여진다.
현재 상태에 마음을 여는 것은 힘겨운 경계성장애에 걸린 중환자조차도 현실의 힘겹거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탈출하
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변증법적 행동치료(DBT) 창시자인 '마샤 리네한'은 이런 행위를 '기꺼이 하기'(willingness)라고 명명하고 DBT의 고통감내를 위한
유용한
치료기술로 만들었다.
'기꺼이 하기'의 반대는 '고집스러움'(Willfulness)이다.
고집스러움은 분노, 짜증, 우울 등 부정적 감정을 동반하는 현실통제에 초점을 맞춘다.
현실과
맞서 싸우며
정서적 에너지를 소모해서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고집스러움은 현실상황에 필요한 것에 정반대로 대항하는 것일 뿐이다.
머릿속 부정적 생각을 멈추고 현실을 수용하는 것이야 말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다.
이런저런 염려를 접어둔 채, 아내와 나는 둘만의 여유로운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택배를 하기 전에는 종종 대중교통, 버스나 전철을 이용해서 먹거리투어를 즐기곤 했다.
오늘은 그때처럼 초롱이를 두고 마을버스로 재래시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사실은 인근의 대도시권 대형백화점으로 가려고 했으나 버스 시간대가 너무 안 맞아 고생할 것 같아 둘이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동안 자연스레 찰떡 같이 한 마음으로
일정을
바꿔버렸다.
점심으로
들깨칼국수를
한 그릇씩 깨끗하게 비워내고
재래
시장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아직 문열지 않은 상점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활기가 넘쳤다.
아내와 아담한 시장 내 빵집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하며
잠시 대화를 나눴다.
우리의 미래
에 대해서, 아이들의 장래에 대한 이런저런 바람들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아내에게
냉정한
지적과 조언을 받았다.
지나친 바람을, 욕심을, 계획을 내려놓으라는 아내의 말은 그냥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내 생각이 아닌, 나의 고집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라는 또 하나의 현명한 조언이었다.
아들들과 함께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간 불가마 찜질방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등도 밀어주고 훈제된 계란을 먹으며 친밀감도 나누었다.
큰아들이
'
편안히 잘쉬다 갑니다'란 말을 남기며 다시
제
둥지로 되돌아가는 뒷모습과 배웅하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가만히 이 모든 현실이 나의
소소한
행복의 실체임을 받아들였다.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집착하려는 고집을, 생각과 염려들을 이제는 그만 멈추고 내려놓기로 했다.
우리는 그렇게 연휴의 끝자락에서 그냥 그대로의 삶을, 사소한 현실 그대로를 수용하고 직시하는 연습을
편안하지만 정성스레 시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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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택배하며 몸글을 쓰며 삽니다. 평범한 삶 속에서 엮이다 남겨진 감정을 재료삼아 글을 쓰다보면, 새롭게 발견하는 숨겨진 의미들. 그래서 오늘 하루를 또 살아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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