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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돌돌 Sep 18. 2022

김용철 작가 '빈집' 소설의 다양한 사랑법

독서 그 이상한 힘



김용철 작가는 1939년 생으로서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신춘문예에 시 '소상'으로 등단했지만 현대문학에 소설 '열녀비'로 등단하면서 시인보다는 소설가로서의 성취도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1998년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가 이기도 하다.  


이번에 읽은 '빈집'은 단편소설을 묶은 집이다. 김용철 작가의 모든 단편은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높은 질량의 작품성을 갖고 있다. 대부분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의 내밀에 대해 교수나, 기자, 혹은 여행사 직원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높은 완성도를 꾀하고 있다. 


이 작가는 당대 지식의 아픔을 중후한 안목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가장 인간의 근원적인 사랑을 문학적 마중물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내가 이 작가의 작품을 눈여겨보는 것은 문제작이거나 화제작, 아니면 농밀한 문장력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작가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가끔은 지나친 애정관계를 내세워 신경을 자극하지만 이것도 성도덕의 상실이라는 세태 풍조를 적나라하게 파헤쳤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가는 소설적 대화라는 가교를 통해 흥미와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대화의 유희를 제대로 살리는 작가다. 이 소설집에는 10편의 단편소설이 상재되어있다. 모두가 재미있게 읽힌다. 



1편 바람의 얼굴


이 소설은 K대학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강릉으로 떠나는 중년의 교수를 중심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버스 대합실에서 웬 중년의 여자를 통해 버스표를 구입하게 되는데 그 여자는 동행할 친구가 갑자기 강릉에 못 가게 돼서 버스표를 팔게 되었다고 했다. 


늦가을 바람이 제법 칼칼한 날씨에 교수는 버스에 올랐다. 운명처럼 여자의 짝이 되어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친정이 강릉인데 내일이 마침 친정아버님 생신이어서 강릉에 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 중년의 여자와 대화는 일상적이었고 진솔해 보였다. 서로의 대화가 깊어질수록 둘은 야릇한 기운에 젖어가고 있었다. 


여자와 남자는 자연스럽게 호텔 프런트에 다가가 305호 방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그 여인을 대뜸 끌어안았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을 때 여인은 잎을 옆으로 돌리며 소삭이듯 말랬다. '선생님 이따가 이따가요'


얼마 후 둘은 오래 사귄 연인처럼 바닷가를 걸었고 횟집에서 회와 생선찌개를 주문했다. '선생님, 꽉 채워주세요. 여인은 정작 술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연신 술잔을 비워댔다. 술 솜씨가 곡예사의 줄타기를 갓 배운 애송이 광대처럼 위태위태했다. 


여인은 교수인 남편의 후처로 들어갔다. 큰 아들이 총학생회에 차장으로 뽑혀 맨 앞장서서 화염병과 신나병을 던지면서 주모자급으로 판정이 되어 경찰에 구속되어 감옥에 가고 나서 부부간의 성생활에도 적신호가 켜지고 말았다. 


남편은 전실 자식과 차별 대우해 키워서 그 녀석이 반항심이 생겨 운동권 학생이 돼버렸다고 했다. 또 남편은 자식을 감옥에다 보낸 에미는 자식의 장래를 망친 여자고 자식의 장래를 망친 것은 자식을 죽인 거나 진배없으니까 아내한테 살인자와 똑같다는 말까지 했단다. 그 후 남편은 잠자리를 피했다고 했다. 


그날 남자는 여자를 부둥켜안았고 여인의 몸 위에 몸을 던지려고 했지만 순간 남자의 물건이 하잘 것 없이 시들어 버려서 관계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여자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괜찮다고 말하며 저만큼에 따로 이부자리를 펴고는 그쪽으로 가 누워버렸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없어졌다. 남자가 산책을 하고 와서 때 프런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 여자였다. 오늘 새벽에 남편이 강릉에 숨겨두고 동거하는 젊은 여자의 현장을 덮쳤다고 했다. 남편은 강릉 K대학 세미나에서 참가한 교수라고 하면서 이혼이 어떻겠냐고 상담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한 보름쯤 지난 어느 일요일이었다. 조간신문을 뒤적이던 남자는 '운동권 아들 복역 비관, 자살로 끝난 부정'이라는 K대학 교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이 소설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한 여자의 이탈을 통해 명징한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사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이런 3류의 멜로도 문학적으로 두드러지게 통찰하면 멋진 소설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이 작가의 문학적 깊이를 알 수 있었다. 이 진부하고 단순한 소재를 가지고 끝까지 읽게 만드는 작가의 농밀한 문학적 기교가 부러웠다. 



2편 빈집


아내가 췌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자식들마저 병 가료하게 되었다. 남편은 빈집을 지키면서 외로움과 적요감으로 인하여 개한테 일부러 화풀이하기 까지 한다. 


'시끄러워 개새끼들아. 주인을 보고 더 크게 짖는 개들한테 그는 '주인도 모르는 이 개 같은 놈들아' 혼자 욕을 퍼붓는다. 그러다가도 개들보고 개 같은 놈들이라는 자신의 수작도 우습기만 하다. 그는 그렇게라도 개한테 욕을 해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는 TV를 이리저리도 돌리다가 이내 꺼버린다. 그는 절해의 고도에 버려진 것처럼 외로웠다. 그리고 혼자 떨어져 있는 경우엔 아무것도 할 짓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한국의 아낙네들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 진땀을 흘리면서도 곧잘 김을 맬 수 있는 것도 대화 속에 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딸네 집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딸은 엄마 편을 들고 있었다. 담석은 무엇보다도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라면서 아빠가 맨날 밤늦게 다니고, 술 먹고 다니고, 엄마가 어쩌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엄마를 죄인처럼 닦달을 하고 그래서 가슴에 못이 박히고 그 못이 돌로 변해버렸다고 했다. 


그는 나이 60이 다 되도록 직장에 매달려 있는 네 아버지는 그럼 스트레스 안 받고 스텐레스 받는 줄 아냐고 하면서 딸의 생각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그의 딸의 공격은 갈수록 강도가 높아졌다. 이쯤 되면 그는 곤욕스럽다 못해 슬슬 약이 오르기까지 시작했다. 


그는 송수화기를 놓은 다음 보료 위에 몸을 눕혔는데 그때 그가 즐겨마시던 술 한잔이 생각났다. 술 하면 그가 잘 가는 인사동의 카페 '유혹'이 떠오른다. 거기에는 그가 좋아하는 미스 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미스 박을 알게 된 것은 거의 3년 전 우연히 친구들과 유혹에서 한잔하게 된 뒤부터다. 그의 50대 후반의 아내는 폐경이 되면서 그와의 성생활을 거의 일방적으로 거부했다. 그는 아내 대신 '유혹의 미스 박에게서 성적인 욕구를 대상 받게 되었다. 


아직 30 정도인 미스 박은 그와 30년 정도의 연령차가 있지만 오히려 그의 섹스파트너로서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후에 만난다. 그녀와는 그와의 관계를 가진 뒤 꼭 몸값으로 10만 원씩을 받아가는 술집 아가씨이기도 했다. 


'미스 박, 한 달 에 이렇게 두세 번 말고 네댓 번쯤 만나주면 안 될까?' 그는 나이를 잊고 가끔 생떼를 써보았지만 '저도 이사사님 같은 분을 매일이라도 뵙고 싶지만 그러다간 사모님이 아시면 큰 일 나십니다. '자네 나 말고 이렇게 만나는 나이 지긋한 남자가 또 몇인가 더 있지? 그는 의심까지 해보았다. 


그는 미스 박이 몹시 보고 싶어 져서 자신도 모르게 다시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는 내 와이프가 입원을 했는데 앞으로 열흘 이상 병원 신세를 저야 한다며 만나자고 했다. 사실 그는 오늘 밤 솔직히 미스박이 그리운 것이 아니라 혼자 빈집에 누워있으니 가슴에 품어 자고 싶은 여자가 그리웠던 것이었다. 


미스박은 진득이 참아보라고 어깃장을 놓았고 이미 몸이 달아오른 그의 요구가 거듭되자 그렇다면 오늘 밤에라도 당장 가서 회포도 풀어드리고 내일 낮엔 파출부 노릇도 해준다며 그에게 기상천외의 소리를 했다. 그의 계속된 요구에 미스박은 알았다며 사나흘 뒤에 사모님 담석 제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한번 유혹에 들르라고 했다. 그는 그때서야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가 '유혹'에 간 것은 그러니까 그의 아내가 수술을 마친 뒤 사흘째 되는 날 밤이었다. 그날 그는 모텔에 가서 '유혹'의 미스박한테 전화를 했다. 거의 20일 만에 치른 그와 미스 박과의 대사(?)는 그런대로 황홀했고 절실하게 잘 끝났다. 


그는 다소 나른한 피곤을 두른 채 택시 편으로 밤 10시가 가까워서야 우이동 집 앞에 당도할 수가 있었다. 대문을 따고 마당에 들어섰을 때 난데없이 현관문이 열리면서 그의 딸 목소리가 들려서 왔다. 딸네 식구들이 와 있었던 것이다. 


이내 밤이 깊었다. 그때 전화벨이 온 집안의 정적을 찢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뜻밖에 미스 박 목소리였다. 


'빈집에 혼자 주무시기에 얼마나 적적하세요. 아까는 제가 사양했지만 술을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나니까 이사님이 또 보고 싶어서 지금 당장 우이동으로 가려는데요. '


그는 지금 빈집이 아니라 딸네 식구들 죄 왔다고 했지만 미스김은 '딸 사위야 왔거나 말거나, 이사님이 저를 언니 방으로 턱 안내하시고 이사님 그 즐겨하시는 대사를 또 멋있게 한판 치러보시지 그러세요?'   



*이 소설은 아내와 자식이 없는 빈집을 지키게 되면서 그가 빈집의 외로움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는 아내에게 빈집만을 지키게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50대 중반의 나이에 폐경이 와서 남편을 밀어내는 아내 대신  '유혹'이라는 술집 여자 미스 박과 한 달에 두세 번 만나 곡예사의 줄타기 같은 불장난으로 회포를 푼다.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불륜을 주제로 인간의 허전함과 나약함을 테마로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3편 뒤엉킨 계절


'선배님, 그 쓸데없는 푸념 그만하시고 제발 집에나 갑시다. 선배님은 그래도 무능교수니 어용교수 소리 안 들어 천만다행인  줄 아세요. 아 교수가 엉터리 같은 학생 놈 주먹으로 몇 대 때리는 건 예사지, 그걸 가지고 교수를 물러나라니 말도 안 됩니다.' 


박사를 따고 힘든 신고 끝에 겨우 얻어낸 교수직인데 폭력 교수라 물러나라고 학생들이 데모를 하자 오 교수는  술이 당겨 같은 학과 곽 교수와 학교 근처에서 이미 한잔을 꺾고 인사동 이 술집에서 2차를 하고 있었다. 곽 교수는 한잔 더하겠다는 오 교수를 간신히 택시 태워 보내고 응암동 집에 가는 택시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택시에 대고 벌써 몇 번을 외쳐봤지만 택시 잡는 것은 허사였다. 빗속을 질주하는 택시들은 흡사 무슨 특수임무를 띤 군용 차량처럼 오만하게 보였다. 그때 택시 한 대가 서행으로 다가왔다. 뒤에 앉은 손님이 곽 교수를 잔뜩 뜯어보더니 기사에게 무어라고 하는 듯했다.


'저 지금 합승하신 선생님, 이 아가씨가 왜 차를 세우고 선생님을 굳이 모신 줄 아세요?. 불광동에서 내려 꼭 한잔 하실 만한 상대를 찾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까지 합승하자는 손님 중에 선생님 만한 분이 없었다 이겁니다. 따라서 선생님은 이 아가씨가 심사해서 고른 대단한 양반입니다.'


'호호 아네요. 저 불광동 쪽에 제 언니가 얼마 전에 카페를 하나 냈걸랑요. 개업할 때만 가보고 한 번도 못 가봐서 오늘은 거기 가서 술이나 한잔할까 하고요. 곽 교수는 그녀가 술집에 나가는데 오늘은 비가 오는 탓인지 손님도 없고 해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나왔다는 말에 술집 여자치고는 참 솔직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곽 교수는 마담 언니가 운영하는 술집에 갔다. 그녀와 마담 언니는 거나하도록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그녀의 대화적 표현이나 행동으로 봐서 참 지식이 많은 아가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집을 나왔을 때 그녀는 오늘 아침 오빠랑 대판 싸우고 나왔다며 실은 마담 언니랑 같이 자볼까 하고 왔는데 언니도 오늘따라 애인이 어디서 기다리고 있어서 잠을 잘 곳이 없다며 여관에 같이 가셔서 방만 하나 얻어달라고 했다. 그녀는 이 시간엔 솔직히 여자 혼가 가서 방을 달라면 십중팔구 없다고 한다며 방값도 본인이 직접 계산하겠다고 했다. 


여관에 가서 알몸이 된 두 사람은 침대 위에서 노도처럼 뒤엉켰다. 그녀는 눈물 없이 마구 우는 소리를 냈다. 곽 교수는 만 원권 몇 장을 화장대 위에 내놓고 그녀를 한번 안아준 채 다시 가방과 우산을 챙겨 들었다. 허둥지둥 여관을 나온 곽 교수는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거의 한 달이 지났다. 곽 교수는 연구실 창가에 서서 비 내리는 교정을 무심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연구실 문이 열리며 웬 한 달 전의 그녀가 그 분홍빛 레인코트를 입고 그의 연구실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녀는 일문과를 딱 1년만 다니고 나서 중퇴를 했다면서 교수님은 모르셨겠지만 그날 택시에서 대뜸 곽 교수님이시란 걸 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혼한다면서 청첩장을 내밀었다. 한 학기를 가르쳐주신 은사이시며 모교의 교수님이시라며 주례를 서달라고 응석까지 부렸다. 


곽 교수는 맥이 탁 풀려 무슨 말을 못 하다가 결국 웃으면서 승낙했다. '그래 서주고 말고, 하하 축하하네'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김용철 작가의 소설 중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남녀 간의 상열지사다. 특히 남녀의 사랑은 온당하고 정상적인 범주의 사랑이 아니라 작가의 소설적 장치에 의해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저 남녀 간의 육체를 탐하는 사랑이다. 


이 '뒤엉킨 계절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지성인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인간이 얼마나 탈선할 수 있는지에 

사제간의 탐욕을 매개로 과감 없이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설에 매료되는 것일까. 




4편 낙산초


서영의 형부는 레슬링 선수다. 더 정확히 말하면 N대학교 레슬링 코치다. 그런 형부는 남자라기보다 그저 수컷일 뿐이다. 여기저기 염문을 뿌리는 그 수컷이 바로 형부다. 하지만 서영은 형부 덕에 이렇게 N대학교 별장에 와서 방을 두 개씩이나 얻어 형부네 가족과 함께 편하게 지내고 있는 것에 대해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서영은 낙산의 야경을 한번 둘러보고 싶었다. 바람 좀 쐬고 오겠다고 별장을 나왔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래밭을 지난 서영은 우선 바닷가로 가까이 가 보았다. 해안 경비 탓으로 밤바다는 접근이 어려웠지만 그런대로 솔밭을 막 지나자 먼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서영이 너 낙산에 가거든 멋진 아르바이트나 하고 또 하고 와라. 술도 마시고 용돈도 벌게' 떠나기 전날 밤 같은 과의 혜자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혜자는 힘도 안 들이고 그딴 소리를 했다. '미쳤니? 넌 내가 뭐 작부인 줄 알아' 서연은 호되게 쏴줬다. 


서영은 사실 아르바이트에 질질 끌려다니며 살았다. 가난 때문이었다. 대학생 교통정리, 출판사 원고 교정, 은행 안내원, 백화점 판매원, 일식집 시간제 종업원, 그러다가 나중에는 카페인지 레스토랑인지 룸살롱인지 애매모한 접객업소에도 나가 술과 안주를 나르는 노릇을 해봤다. 아르바이트에 대해서는 역전의 용사였다. 


승용차들이 제법 드나드는 길을 따라 호텔 정문까지 찾아간 서영은 짐짓 태연한 얼굴로 현관을 지났다. 사람들은 북적였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뒤를 이어 북쪽 창가에 앉을 수 있었다. 이 해수욕객 중에 제 마누라 제 가족 하고만 피서를 온 진국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늑대, 이리, 너구리, 구렁이다. 바닷가엔 그런 동물들의 축제가 지금 한창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이 자리 좀 같이 앉아도 되겠습니까? 우리도 커피 한잔하러 왔는데요. ' 30대 중반의 청년 둘이서 웃고 서 있었다. 


요상한 노릇, 벌써 늑대가 둘씩이나 제 발로 나타난 것이다. '앉으세요. 전 혼자니까 호호' 서영은 나도 애교 좀 피워보자며 대뜸 친절을 보였다. 파트너 없이 혼자 피서를 왔냐는 말에 그녀는 아르바이트 나온 여자라고 말을 하면서 막상 오고 보니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고 했다.  땅달보는 도대체 무슨 아르바이트를 원하냐고 물었다.   


'호호, 젊은 여자가 이 바닷가에 나와서 그딴 짓 않고 돈벌이가 또 뭐 있겠어요?' 서영은 태연히 대꾸했다. '아가씬 미모도 있고 교양도 있어 뵈는데 굳이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그럼 우리 둘 중에 어느 한 사람하고 술집에 가면 안 될까?'


'호호 좋아요. 그런데 비싸요. 호텔까지 가는데 딱 두장이죠 뭐' 서영은 말을 해놓고 덜컥 겁이 났다. 서영은 단둘이 가자는 말에 어느 케이스이든 선불을 요한다고 했다. 땅달보는 이 호텔 311호에 우리 둘이 자려고 얻어놓은 방이 있다며 그 방에서 주겠다고 했다. 


'호호, 지금 이 자리에서 주시기 전에 따라갈 수 없어요' 서영은 그렇게 말하고 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이젠 어쩔 수가 없어서 체념했다. '소설가는 도둑질 빼놓고는 다 경험해봐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소설창작론을 지도하는 H교수님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글쎄 이 녀석아 네 놈이 그 잘난 여비에서 20만 원이나 공제하고 나면, 앞으로는 나만 괴롭히든가 아니면 낼 당장 서울로 올라가야지 별수 있어? 진작 찬물 먹고 맘 돌려라' 키다리가 역시 서영의 어떤 그림자를 옳게 읽어낸 모양이었다. 


'아니 처제 여기서 뭘 해? 음 대학 선배님들이신가? 돈 20만 원에 창녀처럼 전락할 판인데 고마운 구원자였다.  바로 형부였다. 


형부가 별장에 들어온 것은 다음날 아침 10시가 넘어서였다. 외박을 하고 들어와 고스톱 치다 늦었다며 변명을 하고 있었다. 언니 서경은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는 형부 앞에서 오히려 제풀에 누구러지고 있었다. 형부는 저녁 해거름이 되어서야 생기가 넘쳤다. 서영은 형부한테 왜 여기가까지 와서 외박이나 하구 난리냐며 벌로 횟집에 가서 술 한잔 사라고 했다. 


서영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회도 안 좋아하고 몸도 열이 있고 해서 아이들하고 있겠다며 형부가 회라도 한번 사야지 여기까지 끌고 와서 도대체 뭐하고 다니는 거냐고 남편을 되쏘았다.  서영은 고스톱 치시는 것보다야 처제와 데이트하는 편이 낫겠다며 별장을 나왔다. 


두 사람은 솔밭길을 나란히 걸었다. 서영은 어제 아르바이트 좀 하려다가 형부 때문에 들통났다며 깔깔대 보았다. 서영은 여름 바다를 혐오한다고 했다. 세상에 훌렁훌렁 벗고 덤벼들어도 히히거리고 받아주는 저 꼬락서니가 뭐냐며 술잔만 연신 비워 형부에게 권했다. 회가 나오자 술잔의 회전이 더 빨라졌다. 


'아, 처제 그 얘기 좀 해봐, 무슨 아르바이트를 어쨌다고?  술이 거나해진 형부가 묻자 서영은 아르바이트로 그 두 남자 중에 한 남자와 호텔에 갈 뻔했다고 했다. 서영은 그 남자들에게 여고만 나오고 논다며 20만 원만 내면 따라가겠다 했는데 그중 남자 하나가 2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 처제 웃긴다. 그래 정말 20만 원 내면 어쩔 뻔했어?' 형부의 눈빛이 빛났다. '칼같이 갔겠죠. 요즈음에 여대생 순결이 뭐 대순 가요. 더구나 진짜 처녀는 희귀 동물이라던데요.


형부는 거푸 몇 잔을 또 마셨다. 그러더니 그는 이상한 눈으로 처제인 서영을 넘봤다. '허허 기왕 그렇다면 말이야, 오늘 밤에 이 형부에게도 아르바이트할 생각 없어?' 형부는 역시 뻔한 인간이었다. 서영은 내심 분노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 '호호 물론 가능하죠. 당장 20만 원만 내놔보세요'


'하하. 하긴 말이야 어떤 친구는 처제를 길들여 시집보낸다고 하더군, 또 그건 아무 죄도 아니라나?' 점입가경이었다. '호호, 전 이미 길들어 있으니까요. 그건 걱정 마시고 돈이나 처억 내놔요. '좋았어. 하지만 이건 영원한 비밀이야'


수표를 받아 든 서영은 ' 흥 이 수표 언니에게 그대로 전하겠어요. 당신이 사람이야' 술청이 떠나게 소리를 질렀다. 왜 갑자기 화를 내고 지랄이야 하는 형부의 말에 '이 더러운 돈 되돌려줄 테니 오늘 밤도 또 외박이나 하구와 봐요. 서영은 종이쪽지를 형부 앞에 홱 내던지고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왔다. 


바로 서울로 올라온 서영이는 그다음 날 언니한테 전화 걸어 형부 아직 주무시냐고 물었다. 언니의 말이 가관이었다.   


"네 형부가 어제 새벽 2시까지 퍼마시고 들어와서 참 무슨 변덕이 났는지 보너스라며 내게 1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턱 쥐어주고 자더라. 형부는 역시 대장부다운 데가 있어." 



*이 소설은 콩트에 가깝다. 해학과 넉살이 있다. 남자의 인면수심 같은 본질을 처제를 통해 적나라하게 파헤쳐지고 있다. 사실과는 유리되어 있는 내용처럼 보이기는 하나 세상은 요지경이어서 이것도 실체에 근간할 수 있는 충분한 틀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은 '빈집'을 읽고 밑줄 그은 부분이다. 


거짓말은 이골이 나면 참말처럼 하니까요 

다섯 시간은 내처 잠을 잘 수 있었다.

절해의 고도에 혼자 버려진 것처럼

밤을 새워 타일러도 벽창호였다구요

언니 퇴원하실 때까지 진득이 더 참으시던가.

호랑이도 제 골 짐승은 안 잡아먹는다

나무는 덕을 가졌다 나무는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않고 왜 여기에 놓이고 저기에 놓였는지를 탓하지 아니한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살인자니 그 어떤 이름으로도 미화될 수 없다

준치는 썩어도 준치,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다

과잉 보복행위를 고발함으로써 6.25를 재조명하거나 

사회 고발의 나팔수 노릇

남자와 그거 한다고 계량기 돌아가냐

아무리 내돌려봐라 어디 수절할 여자가 있다더냐 

하하하 적당한 겸양은 미덕에 속하지

입이 무거울 땐 반창고를 붙인 것 같아요

제가 햇처녀인가요? 후회씩이나 하게

위선자 배신자 야누스 너구리

제보자의 비위를 흔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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