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너구리 페리

by 이토리

초등학교 1학년, 진주초등학교에서 개최하는 교내 시 쓰기 대회를 위해 구형 흰색 아반떼 차량을 타고 가며 창문으로 보이는 맹방 해수욕장과 흩날리는 벚꽃을 시로 표현해 보았다. ‘꽃잎이 바람을 타고 간다’라는 구절을 읽자마자 터져 나오는 부모님의 탄성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글쓰기라는 행위를 좋아했던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뒤로 각종 글짓기, 시 짓기 대회, 백일장 등에 스스로 참가하며 글에 대한 자신감과 열정을 가득 키워나갔다.


이후에는 비단 대회뿐만이 아니라 내 글을 더 넓은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나의 경험들을, 나의 가치관들을 멋들어진 나의 글솜씨를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다. 한편으로는 내가 매력적인 사람이 되길 바랐다. 구태여 상상을 해보자면 영화배우 박정민이 유튜브에서 보여주는 한결 편안한 모습에 대비되는, 예컨대 격정적이고 설레는 멜로물이나 멋있는 영웅담이 펼쳐지는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을 보아하면 그 사람에 대해 굉장히 의문감이 들고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평소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 어느 순간 180도의 반전 매력을 보여준다면 그에 따른 반전미는 꽤나 매력적이라고 생각이 든다.


평소에는 ‘우리 원딜 박정민’ 우원박으로 지내다가 영화배우 박정민으로 완벽 변신하여 명품연기로 자신의 반전 모습을 보여준다면, 나는 글쓰기로 나의 반전매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한 마디로 ‘쟤는 얼굴만 이쁘장 한 줄 알았더니 글까지 잘 쓰잖아! 정말 매력적인걸?’ 이런 소리를 듣고 싶다는 것이다 (상당히 솔직하죠, 하지만 진심이랍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작은 글노트를 만들어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써 내려간 오리너구리 페리가 그려진 나의 글노트는 절반 가까이 채웠던 걸로 기억한다이후, 기숙사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면서 집에 방문하는 일이 현저히 적어지게 되었고 그 사이 시바견이 그려진 다른 공책을 벗 삼아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난 나의 오리너구리 페리. 집안 곳곳을 낱낱이 뒤지기 시작하는데 아쉽게도 결국엔 발견하지 못한다.


이럴 때 쓰는 엄마찬스. 엄마에게 물어보니 엄마도 모르겠다고 한다. 몇 개월에 걸쳐 여기저기 찾아봐도 오리너구리 페리 씨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끊임없이 노트를 찾아 헤매니 엄마는 결국 안 쓰는 노트인 줄 알고 버려버린 것 같다고 실토했다. ‘미안해, 엄마가 버려버렸나 봐. 거의 다 사용된 공책이길래 집안 청소할 때 버렸던 것 같아.’ 나는 극대노를 하며 나의 친구 오리너구리 페리 씨를 추모했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나의 감성이 모두 사라진 셈이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글을 모두 촬영해 둔 것이 다행인 일이었다.


문제는, 내가 정성 들여 창작한 나의 글노트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니 순간 글에 대한 마음이 팍 식어버렸다. 예를 들자면 나의 시간을 쏟아가면서 열심을 잔뜩 부어 만든 케이크가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 연습용 케이크인 줄 알았다며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는 그런 느낌. 독자분들은 내가 어떠한 마음이었는지 충분히 이해를 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비단 엄마의 잘못만은 아니다 (엄마가 집안 대청소를 할 때마다 내 물건이 자꾸 사라지는 것은 물론 잘못이다!). 내가 오리너구리 페리에게 한동안 발길이 뜸했던 것도 있었다. 내가 시바견 글노트를 구매하니 삐져서 가출한 것일 수도 있을 듯싶다.


그렇게 나의 페리 씨는 내 품을 아련히 떠나가고 새로운 글노트에 정성 가득 담아 내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선선하게 풍겨 나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행여나 틀린 글자가 새어 나올까 조마조마하면서, 그날의 감정을 다시 바느질하여 노트에 수를 놓을 때에는 늘 행복했고, 슬펐고, 소망했다. 지금은 시바견이 나를 지키고 있지만, 페리 씨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비록 나와는 멀어졌지만, 희미하게 기억되는 첫사랑 같달까. 내가 작가라는 꿈에 한 발짝 다가가게 해 준 공책이자 서투르게 달리는 나의 연필 끝을 잡아준 노트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만날 수 없지만, 나의 페리 씨. 이 글을 끝으로 보내주려고 한다. 잘 가요 나의 페리 씨. 사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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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