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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May 27. 2024

국수 하던 날

물레방앗간이 말했다

오늘은 우리 집 국수 하는 날.

정침터에 심었던 밀, 

도리깨로 탁 탁 두드려 성긴 낟알 여물도록 바짝 말려 

들녘 한가운데 물레방앗간에서 국수를 뽑는 날.

이른 아침, 엄마는 국수 담아 올 그릇들을 이것저것 챙겨서, 

나에게 동생 손을 잡고 뒤따라 오라 하고서는, 대문을 바삐 나셨다.


엄마는 저만치 앞서 가셨고

동생을 호위하며 걷는 내 발걸음은 느릿느릿하였다.

방천을 올라 강변길로 접어들었다.

경쾌한 봇도랑 물소리  

팔딱팔딱 개구리 개구진 합창

매암미암 매미들의 절대 고음 

귀는 실룩실룩, 입은 봉긋봉긋 장단을 맞추었다.

초록 옷으로 한껏 멋을 부린 들녘, 청량하였다.



물이 좋아서 강옆에 홀로 집을 짓고 살던 물레방앗간, 

방앗간 아재가 키를 올리자 잠자고 있던 물레방앗간이 덜커덩 일어났다.

'바쁘다, 바빠!'

눈 비빌 새도 없이 물레방앗간 바쁘게 움직였다.


쿵덕쿵덕 콩닥콩닥 북적북적 복작복작 국수 만드는 소리,

신기한 물레방아 구경하는 아이들 소리 재잘재잘 울렸다.


차례대로 칸칸이 물을 싣고 차작 차작 둥글게 둥글게 돌아가는 물레방아,

잔잔히 흐르던 물, 물레를 타고 놀다 맨바닥에 이마가 부딪혀 고함을 내질렀다.

철철 철철 쏴아 쏴아, 치적치적 쏴아 쏴아

저 아래 깊은 곳으로 낙화한 물의 함성, 다시 바닥을 차고 올라와 나를 집어삼켰다. 

"아이고 무서워! 도망가자"


모든 것이 실제보다 거대하게 보였던 어린 시절, 

바깥과는 달리 어둑 컴컴했던 방앗간 안, 눈을 동그랗게 키우고 귀를 쫑긋 세웠다. 

물레방앗간을 끄는 쇠바퀴들이 끼익 끼익  으스스한 신음소리를 내었다. (흠칫 놀라) 

말없이 서 있는 보리 가마니 뒤, 시커먼 그림자가 서늘한 손을 쑥 내밀었다. (머리가 쭈뼛)

나무판자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 온 햇살길에는 뿌연 먼지 입자들이 빼곡하게 차 있었다.(신기방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는 희엿멀건한 먼지괴물, 

소리도 알 수 없다. 

형체도 모르겠다. 

스르륵스르륵 제 맘대로 뭉쳤다 풀어지는 먼지괴물.

"아이고 무서워! 도망가자"

오싹오싹 소름 돋아 줄행랑을 쳤다.


있지도 않은 괴물 보고 놀라 바깥으로 뛰쳐나왔더니 눈이 부셨다.

돌무더기 언덕 호박넝쿨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 연두 노랑 초록 주황 색깔들을 찬미하였다. 

농염한 호박꽃에 날아드는 꿀벌들의 작은 날갯짓, 

동글동글, 둥글둥글 탐스런 호박,

햇빛에 반짝이던 물빛,

땅 위에 자유로이 찍히는 발자국, 해맑은 웃음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두 살배기 동생과 뛰놀았던 그날의 그곳은, 모든 것이 빛났다!



무엇이 그리도 재밌었을까? 무엇이 그리도 좋았을까?

찬란한 웃음소리 장대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

"어이, 어이, 비켜라, 비켜라"

귀에 걸린 입들 뒤에서 아재가 황급히 소리쳤다.

아재, 갓 뽑아져 나온 국수 한 폭 둘러친 대나무 막대기를 나무틀에 척 척 걸쳤다.

 

방앗간 앞마당 낭창하게 널린 따끈따끈한 국수,

우리 집 마당 빨랫줄에 널려있던 동생 기저귀? 발이 달렸나?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신통방통하네!

폭폭 삶아 쫙쫙 펴 넌 새하얀 기저귀 같았던 젖은 국수 한 자락, 

태양 아래 서니 속살이 투명하게 비쳤다.

뽀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햇빛이 따가워 국수발을 드리웠나?

하얀 국수발 한들한들 나부꼈다.

국숫발 부채질에 땀을 식히던 물레방앗간, 

잠시 낮잠을 잘 거란다.

하얀 그늘막 아래 숨바꼭질하는 아이들, 조용조용 조심조심 놀아란다.

'그래, 그래, 알겠어, 잘 자'


날카로운 햇빛이 차분한 국수발을 수직으로 척 척 갈랐다. 

국수가락 사이로 바람이 몰래와 간지럼을 태웠다.

자연의 담금질에 깜짝 놀라 간 떨어진 국수, 

몸무게는 줄어들고 키가 짧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간지럼을 참지 못하고 웃음 터진 국수, 

중간에 톡, 톡 배꼽 잡고 쓰러졌다.


뽀시래기 국수 한 올 입에 물고 또각또각

맛났다!

"누나, 여기" 

찾았다!

동생 하나, 나 하나, 톡톡 분질러 오작오작

"에이, 지지"

동생 하나, 나 하나, 후후 불며 바작바작

재미났다!



얼마쯤 시간이 흘렸을까? 

점심게를 한참 넘겼다.

꼬꼬록, 꼬륵 꼬륵 배꼽시계 볼이 빨갛도록 울렸다.


빳빳하게 올라붙은 국수가락,

방앗간 아재, 작두를 가져와 자를 대어 긴 머리 백발국수 싹둑싹둑 자르고

엄마는 두어 움큼 가지런히 모아 짚 한가닥을 둘러 매듭지어 뭉티기를 만들었다.

커다란 은색 다라이에 향긋한 국수 뭉티기 차곡차곡 담겼다.


"이만큼 들고 갈 수 있겠나" 들었다 놨다 무게를 저울질하시던 엄마 

   "응, 할 수 있어" 당차게 말했던 나

"누나는 국수 들고 가야 하니 이제 혼자 걸어야 한다, 알겠나?" 단호하게 당부하시던 엄마

스스로 가야 한단 말에 서러워 입을 삐쭉 내민 동생,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남는 손이 없자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국수 다라이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양동이를 든 엄마가 앞장서 갔다.

그 뒤를 국수 대야 옆구리에 차고 낑낑대며 내가 줄을 잇고

처음 홀로서기 나 선 동생, 엎어질 듯 말 듯 아장아장 뒤따르며 집으로 향했다.


잘 따라오나 뒤돌아보던 엄마, "힘들제" 하셨다.

괜찮다 했지만 창백해진 손 부들부들 떨려 몇 번을 쉬어 갔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동생, 무릎이 까였으나 울지 않고 툴툴 털고 일어나 걸었다.



국수 뭉티기 마루에 태산을 쌓아 올려놓았다.

뿌듯하였다! 동생과 손바닥을 마주쳤다.

후텁지근한 여름날 풋풋한 국수 한 그릇, 상상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멸치 육수 내어 

정구지 나물 무치고, 

애호박 볶아

마당에 멍석 펴 놓고 한 상에 둘러앉아 먹던 국수,

참! 잘도 넘어갔었지!



국수 하던 날

물레방앗간 

국수가락 차륵차륵 걸어두고 

햇빛을 잡아당겨 붓끝에 찍어 살랑살랑 붓질을 한다


국수 하던 날

물레방앗간 

국수가락 치렁치렁 세워두고

바람을 잡아당겨 붓끝에 묻혀 산들산들 붓질을 한다


국수 하던 날 

물레방앗간 

국수 병풍 펼쳐놓고 

햇빛 바람 거느리고 풍요를 기원하니 모든 것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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