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프로그램에서 일할 때 나보다 조금 더 일찍 들어와 있던 동갑내기 막내 작가가 있었다. 물론 남자 작가가 아닌 여자 작가였다. 털털한 성격에 술담배를 좋아하는 친구라 금세 친해졌고 힘든 막내 생활을 함께 겪으면서 짧은 시간에 나의 첫 작가 친구가 되었다. 항상 같이 일하고 같이 밤새고 같이 혼나고. 이 시절에 정말 선배들에 정말 많이 혼나고 눈치를 보면서 일을 했었다.
며칠 밤을 새워서 인물 자료조사를 하면 꼭 한 선배는 “이게 최선이냐?” “정말 다 찾은 게 맞는 거냐?” “내가 찾아서 더 나오면 어쩔래?”라는 말을 하면서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고는 했다. 당연히 며칠밤을 새우고 중앙도서관까지 가서 찾아 정리한 자료인데 최선을 다했고 여기서 뭐가 더 나오겠냐마는 혹시라도 아주 혹~~~~ 시라도 내가 놓친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당당하게 “네, 이 이상의 자료는 더 없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일을 못했는가?’라고 하면 아니다, 지금도 그 당시 자료조사 파일을 열어보면 ‘와~ 진짜 열심히 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면 도대체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을까?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굳이 이해를 해보자면 그냥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감정 쓰레기통의 역할을 했던 게 아닐까, 그냥 못된 선배였던 것 같다. 그렇게 매일 주눅 들어있는 다른 막내와 나는 선배들에게 자료를 넘겨주고 나면 메신저를 통해서 한참을 넋두리 하고는 했다.
이날도 다른 막내가 자료조사를 마치고 선배들에게 한소리 듣고는 잔뜩 풀이 죽은 채로 자리에 돌아왔던 걸로 기억한다. 이어서 내 메신저 창에 알림이 ‘깜빡깜빡’ 울리기 시작했다. 방금 혼나고 돌아온 막내였다. 그 애는 자리에 앉자마자 선배들에 대한 욕을 한 사발 풀기 시작했는데 그 분노가 노트북 화면을 뚫고 나올 지경이었다. “도대체 왜 지 X이지?”, “지들은 얼마나 잘한다고?”, “지들은 하는 일도 없으면서” 등등 분노 가득한 채팅이 일방적으로 내 화면에 띄어졌고 너무 피곤한 나는 매번 똑같은 욕을 하는 그 애의 채팅도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저 “맞아~”, “응~”, “그러게 말이야~” 정도의 영혼 없는 대꾸로 응수를 해줬다. 메신저 채팅으로는 부족했는지 소리 내어 욕을 하고 싶었던 그 애는 편의점에 다녀오자며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편의점을 오가는 내내 함께 선배들 욕을 쉼 없이 하면서 그 애는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풀렸는지 상기됐던 표정이 많이 가라앉았다. 그에 비례해서 나의 피로감은 더욱 쌓여갔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 뭔가 평소의 사무실과는 다른 공기가 흐른다는 게 느껴졌다. 재앙을 미리 눈치채는 동물들의 직감 같은 것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자리에 다시 앉았을 때 노트북 화면에 메신저 창이 띄워져 있는 것을 보고는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싸늘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선배들은 우리를 불러내어 메신저 내용을 하나하나 읊어주었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피가 머리로 쏠려서 두통과 어지러움증이 동반되었다. 순간 이제 갓 시작한 나의 작가 생활이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다행히 이것을 문제 삼아 잘리는 일은 없었지만 이것을 빌미 삼아 선배들에게 더욱 미움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다른 막내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며 먼저 프로그램을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