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붕어빵, 버섯, 아이스크림의 공통점은?
정답 : 키링
1분 남짓한 숏츠와 릴스가 알고리즘을 지배함에 따라 내 뇌가 점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어렸을 때는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가만히 책에만 집중한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요즘은 기껏 펼친 책 옆에 휴대전화를 두고 5분마다 건드린다. 딱히 연락할 사람이 있는 것도, 기다리는 연락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숨 쉬듯 전화기를 만진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유튜브 한 번 들어가면 한 시간씩 흘러있다. 이게 도파민 중독이 아니면 뭐가 중독인가.
적어도 뜨개를 하는 시간만큼은 도파민 수용체의 안녕을 기원할 수 있다. 두 손을 실과 바늘에 묶어놓지 않으면 쉽사리 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긴 하지만, 조절하겠다는 의지를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나. 근데 뜨개 생활에도 도파민 중독이 침투할 줄은 몰랐지.
민무늬에 탑다운 방식을 가정하고 옷을 한 벌 뜨는 데에 일주일 정도 걸린다. 무늬나 배색이 들어간다면 곱절은 더 걸리겠고. 여가에 뜨개만 한다면 말이다. 지인과 약속을 잡거나 외부활동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완성은 미뤄지고, 그게 이 주가 될지 삼 주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 몇 주나 같은 실과 도안을 붙들고 있는 게 지겨워져 자꾸 다른 도안을 뒤적인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창시절 내내 인내와 끈기라는 단어가 생활기록부에서 빠지지 않았던 과거는 전부 어디로 가버리고 넷플릭스 이어보기 탭에 10개가 넘는 영화를 가지고 있는 현재만 남아버렸나. 고작 한 시간 반짜리 영화를 보면서도 중간에 집중력을 잃어 꺼버리니 혼자서는 제대로 영화 한 편 보기가 힘들다. 영화관에 앉아 큰 스크린과 빵빵한 사운드가 날 강제로 붙잡아 두어야만 끝까지 볼 수 있다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알 도리가 없지만 그렇다고 손에 잡히지 않는 뜨개를 그대로 둘 수도 없다. 이럴 때는 조그만 소품을 뜨면서 성취감을 빠르게 느끼는 게 중요하다.
지난 겨울에서 이번 봄으로 넘어올 때가 그랬다. 해가 바뀌고 나이는 먹는데 – 누군가에겐 적은 나이겠지만 – 제대로 이뤄낸 건 없고 어디 가서 당당하게 날 소개할 대명사가 없다는 게 적잖은 허탈감을 줬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게 좋다는 걸 알지만 오직 나만 생각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닐 뿐더러 난 나에게 떳떳하지도 않다. 게으른 주제에 목표치가 높아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바늘을 잡았다. 편물이 되지 못하고 남아버린 자투리실을 끌어모아 뭐든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비장하게 바늘을 들고 실을 엮었다. 목도리가 되지 못한 체리, 가방이 되지 못한 붕어빵, 꽃이 되지 못한 아이스크림이 그럴듯한 모양으로 완성됐다. 다이소 면실, 하이소프트, 램스울 등 모두 다른 실이었지만 한데 묶어놓으니 나쁘지 않았다.
꼭지에 고리까지 끼었더니 어디나 가볍게 달기 좋은 니트키링이다. 신나서 여러 개 만든 김에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는데, 뜨개구리가 버섯에 파묻힌 사진을 답례로 받았다. 나만 신난 게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내 선물이 친구의 책상 한켠에 늘 자리잡고 있다면 그보다 좋은 답례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태를 물리치는 데에 가장 빠른 방법은 나태를 직면하는 거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까닭을 찾는 거다. 조금씩 시간을 전으로 돌려가며 이전 상황을 복기하다 보면 틀림없이 찾을 수 있다. 처한 상황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내 이상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몸이 움직인다. 아, 이렇게 살면 안 되지, 하면서.
또 다음 뜨개로 나아갈 의지를 충전했다. 지금 나는 자투리실 보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시간과 노력으로 천천히 미래를 엮는 중이다. 완성까지 얼마나 걸릴지, 애초에 완성이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허울뿐이라도 이렇게 위안하면서 살기로 했다. 매일 쓰는 일기와 독서, 뜨개와 습작이 언젠가 더 좋은 나를 만들 거라는 생각으로.
특별출연 동생 손 + 참고한 영상들 목록
1. 체리 https://www.youtube.com/watch?v=BUiJy8Yg15k
2. 아이스크림 https://www.youtube.com/watch?v=7oRwRfYwrbw
3. 붕어빵 https://www.youtube.com/watch?v=aTvia7chJv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