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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절 May 02. 2024

진짜 내 책이 나왔다. 꿈인가? : 북커버

마냥 웃긴 뜨개일지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을 보고 이런 평을 남겼었다.  



내 목적이 작가가 아닌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 직업보다 행위 자체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는 취지의 영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었다. 저 평을 남길 때만 해도 등단이나 출간에 조급해하지 말고 열심히 글이나 쓰자며 위안했다. 그래서 자주 도망쳤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 준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약 10년 동안 글을 썼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글을 썼던 때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때가 아닐까. 조금 더 쳐준다면 대학교 졸업 전까지. 문예창작과에 가니 정말 재능 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다고 해서 좋은 이야기를 쓰는 것도 아니었다. 일정 이상 학점을 유지해야만 했으므로 나름대로 노력은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허탈함이 몰려왔다.      


어느 동기는 졸업도 하기 전에 등단했고 어느 동기는 원하는 학교에 편입해 재능을 꽃피웠다. 난 그들을 보며 꿈에서 도망쳐 한동안 글을 포기했었다. 돈을 벌어야 한다며 회사에 다녔고 통근 거리가 길다는 이유로 퇴근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 바빴다. (실제로 왕복 4시간 거리에 있는 회사를 다니긴 했다.)      


모두 변명이고 핑계다. 사실 실력을 들키기 싫어 도망친 거다. 고작 두 번, 세 번 공모전에 떨어져 놓고 인풋이 부족해 아웃풋이 되지 않는 거라며 쓰는 거보다 읽는 데에 집중했다. 그렇다고 열심히 읽은 것도 아니다. 피곤하니까, 약속이 있으니까, 더 재밌는 여가 활동이 있으니까. 해야 하는 걸 하지 않아도 되는 거로 만드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다 농담처럼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별 없이 정말 갑작스러운 생각이었다. 그냥 천재지변 같은 거였다. 해일처럼 밀려 들어온 정념에 속수무책으로 손을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도입부 오천 자 정도 쓰고 나니 전개가 막혀버린 게 문제였지만. 회사에서 팀장님 몰래 – 근무시간이었다 – 작성한 오천 자는 그대로 몇 년 동안 방치됐다.      


그래도 내겐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걸 계기로 더듬더듬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다른 단편 몇 개를 쓰는 동안 즐거웠다. 쓰고 싶은 이야기를 내 맘대로 만들어내는 건 정말 짜릿하다.      


다시 크고 작은 공모전에 참여했다. 물론 결과는 모두 기대하지 않았고 단지 공모전이라는 마감 기한을 정해두면 꾸준히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참여했다. 10개 중 9개는 두말할 것도 없이 탈락이었지만 개중 작고 소소한 1개 정도는 입상했다. 배부르게 맛있는 밥 한 끼 사 먹을 만한 상금에 가슴이 벅찼다.      


20대 초반과 무엇이 달라졌길래 수많은 낙선에도 개의치 않게 되었을까 하니 아무래도 사회생활이 도움이 되었지 않을까. 별의별 사람과 부딪치고 싸우며 조금은 단단해져 그깟 몇 번의 실패 정도는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된 게 아닐까?     


도망과 실패만 반복하길 몇 년. 지난주에 내 책이 나왔다. 꿈꾸던 내 소설. 웃기게도 회사에서 몰래 썼던 그 오천 자가 시발점이 된 이야기다. 오천에서 오만, 십만 자가 되어 당당히 세상에 나왔다. 옆자리 사원이 보진 않을까 눈치 보며 썼던 글이 서점 매대 위에 올라오다니. 세상일 너무 신기하다.      


저마다 책을 다루는 방법이 다르지만 난 인덱스 메모지로 인상 깊은 구절을 표시해놓는 정도다. 연필을 포함해 어느 필기도구도 책에 절대 대지 않고, 구기거나 훼손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밖에 책을 가지고 나갈 때면 꼭 북커버를 챙기는 이유다. 출판사 북클럽에 가입해 받은 커버도 있고 길을 걷다 계획 없이 들어간 소품샵에서 업어온 커버도 있지만 따끈따끈한 내 책을 위해 직접 커버를 만들어야겠다.      


정갈하고 단정한, 하지만 밋밋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만들고 싶었다. 고민하다 겉뜨기와 안뜨기를 배합해 만드는 ‘제자리무늬’를 이용하기로 했다. 코바늘로 시작코를 잡아 대바늘로 코를 주워 뜨면 되는데, 처음 몇 줄만 규칙을 이해하면 어렵지 않게 완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어렵지 않게 망한 모습이다. 역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군.     

 

가로로 긴 편물을 만들고 양쪽 끝을 접어 책날개가 들어갈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바느질하는 중에 시접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위로 잘라내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바느질한 스티치만 잘랐어야 하는데 원 편물을 잘라버린 것. 서걱, 하자마자 큰일났다는 걸 알았다.      


사용한 실은 필 에코코튼이라는 단종 실이었고 한 볼을 남기지 않고 모두 사용했으며 시작코를 잘라냈기 때문에 수습도 안 됐다. 덕분에 이번 화의 주인공은 이런 모양이 되었다. 미관도 별로고 제 기능도 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진짜 쓰레기가 된 셈이다.      


꼭 소설 같다. 인물이며 구성이며 열심히 기획하고 짰는데 나중에 어설프게 등장한 누군가가 맥락 없이 가위질하는 바람에 시작점에 구멍이 난 거다. 뒤에서 수습하려 한들 앞이 엉망이면 전체 줄거리는 힘을 잃는다. 그럼 그냥 걷어내고 다시 쓰는 수밖에.      


이번 뜨개 북커버도 그런 이유로 편물에서 실로 돌아갔다. 새로 뜨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언제 다시 뜰지는 몰라도 이 실이 편물이 되는 날이 온다면 꼭 소식을 알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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