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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절 Apr 18. 2024

re제로부터 시작하는 뜨개 : 유리알 반팔니트(2)

마냥 웃긴 뜨개일지

약속 전날까지 부랴부랴 뜨던 옷을 겨우 마무리하고 동기와 만났다. 경기도 북쪽 끝과 남쪽 끝, 그리고 서울에 거주하는 세 명이 주기적으로 만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데 이 악물고 어떻게든 해내고 있는 우리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대부분 나이에 따라 변했는데, 대학을 졸업하던 때에는 취업을 걱정했고 취업 뒤에는 연애를 걱정했다. 그리고 어제, 우리는 결혼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비혼주의자가 늘어나고 출산율이 곤두박질치는 세상이라지만 서른을 코앞에 두니 청첩장 받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SNS로 간간이 소식만 접하던 동창은 이미 결혼해 신혼집을 꾸미고 있었고 한때 급식실에서 서로 반찬 뺏어 먹던 친구는 바로 전주에 신혼여행을 갔다. 다들 어디서 그렇게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는지. 신기한 일이다.      


어제 만난 동기 A도 그랬다. 행복한 쿼카를 닮은 A를 이제부터 행카라고 부르겠다. 행카는 스무 살 여름에 만난 연인과 햇수로 8년, 만으로 7년을 사귀며 자연스레 결혼을 생각했다. 서로 결혼 의사도 확인했고 월급이나 자산 규모 같은 민감한 사항도 공유했다고 한다.      


정식으로 결혼 준비를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대충 이쯤이 좋겠다며 시기를 구상하던 중 행카는 연인에게 차였다. 연인이 전한 이유는 종교였다.      


행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난 종교가 없어 잘 모르지만 교회 내 각종 행사와 청년부 일을 맡는다고 했다. 십일조는 물론이고 교회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는 빠지지 못한다. 행카의 연인은 이 모든 활동을 이해해 주었고, 몇 년 동안 교회에 같이 다녀보기도 했다.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종교 활동에 참여한다는 건 정말 사랑 없이는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다.     


지난 겨울, 행카는 연인에게 지쳤다, 는 말을 들으며 헤어졌다.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종교 문제였다고 했으나 그간 너무 힘들었다는 그의 말에 단순히 종교 하나만 문제였던 건 아니었음을 짐작했다. 행카는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연인이 힘겨워했던 그 긴 시간을 행카는 조금도 인식하지 못했다. 이건 한쪽이 둔하거나 한쪽이 잘 숨겼다기보단 둘의 상황 인식 자체가 어긋나 있음을 의미했다.      


지금 행카는 다른 사람과 만나고 있으면서도 전 연인을 그리워한다.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전 연인과 재회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장에라도 돌아가겠다고 했다.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나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게 하등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종일관 울렁거리는 마음을 참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행카는 본인과 연인의 끝이 결혼일 거라고 자만했던 과거를 자꾸만 떠올렸다. 그리곤 현실로 돌아와 괴로워하기를 반복한다. 아무리 일이 바쁘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어도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게 전 연인이라는 존재다.      


그런 행카에게 내 마음을 달랬던 실로 뜬 반팔니트를 선물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만족스러워했다. 한 가지 말을 안 한 게 있다면 목둘레를 고무단 마무리했다가 머리가 들어가지 않는 불상사가 발생해 그냥 다 풀었다는 거 정도. 다시 코를 주워 고무단을 작업하기엔 지난 새벽의 내가 너무 피곤했고 졸렸고… 귀찮았다. 잘 보면 몸통과 소매 끝에 달린 고무단이 목에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미안하다 행카야. 근데 마음에 든다니까 괜찮지?     


  

행카가 다시 행복했으면 좋겠다. 정말 사랑했던 사람과 추억을 묻어두고 새로운 사람과 행복한 미래를 그렸으면 좋겠다. 비단 지금 만나는 사람이 미래를 위한 발판이 되더라도 - 그 사람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 결국엔 원하는 결혼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나에겐 그 누구보다 내 사람이 소중하다.      


제로부터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안다. 한 사람과 오래 연애하다 보면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많다. 이미 모든 걸 공유하고 맞춰놓은 사람을 두고 다시 처음부터 맞춰나갈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심지어 새로 만난 상대가 착한 사람이라면 내 머릿속 모든 생각이 날 찌르는 비난의 화살이 된다. 이 착한 사람에게 내가 무슨 생각을. 나 진짜 나쁘다. 난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어쩔 수 없다. 인간사 볶고 지지는 게 당연한걸. 적어도 상대에게 숨김없이 마음을 말한 행카는 잘못이 없다. 그러니 위축되지 마.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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