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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절 Apr 11. 2024

re제로부터 시작하는 뜨개 : 유리알 반팔니트(1)

마냥 웃긴 뜨개일지

정확히 1년 전 떴던 반팔 니트가 있다. 본래 연인을 위한 실이었지만 헤어지는 바람에 나를 위해 뜬 옷. 정말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다는 슬픔에 무작정 뜬 옷이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충분히 잘 들을 수 있다) 이 옷의 첫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여기>를 참고 바란다.


뜨고 나서 한동안 잘 입고 다녔다.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과장 좀 보태 교복처럼 입었다. 날이 추워지며 옷장에 넣어놨던 걸 올봄에 다시 꺼냈는데, 이제 못 입겠더라. 너무 커서.      


세탁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전 잘못된 세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옷들이 있기 때문에 직접 뜬 옷들은 꽤 엄격하게 규칙을 지켜 세탁하고 있다. 그럼 내가 일 년 동안 이만큼이나 살이 빠졌다고? 무슨 짓을 해도 안 빠지던 살이 차였다는 이유로 쑥쑥 빠졌다고?     


그랬다. 생각보다 스트레스에 약했던 건지, 그만큼 그 사람을 좋아했던 건지 실제로 살이 많이 빠진 거였다. 어쨌든 살이 많이 빠졌다는 기쁜 소식을 친구 백씨에게 말하며 이 옷을 어쩌면 좋을지 얘기했는데, 백씨는 단칼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 옷 원래 컸는데? 나도 몇 번이나 말했는데 네가 그냥 입고 다닌 거잖아.     


맞다. 백씨는 작년부터 줄곧 ‘그 옷 너무 커’를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걸 귀 막고 눈 감아 모른 척했을 뿐이지. 원래 느슨하게 입으려고 크게 떴다며 변명으로 백씨의 말을 무시했었다. 사실 큰 건 알고 있었는데.    

 

이 변명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이미 중간에 여러 번 풀고 다시 뜬 옷을 또 풀고 싶지 않았다.

2. 큰 옷으로 내 몸을 덮은 느낌이 꼭 누군가 날 안아주고 있는 것 같았다.     


2번의 ‘누군가’란 물론 헤어진 연인을 말하겠지. 그를 위해 준비했던 실로 굳이 큰 옷을 만들어 몸을 덮고 있단 사실이 내심 위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헤어지자마자, 당시에는 그랬다는 말이다.      



이게 딱 당시 여름이다. 스스로를 싫어하던 때라 저 옷을 입고 남긴 사진이 없어 이렇게밖에 보여줄 수 없지만 저 때도 이미 목둘레가 상당히 컸다는 걸 알겠는가. 음, 잘 보이지 않는 사진을 가져와 당당히 물어 미안하다.           

이제 이 옷은 못 입는 옷이 됐다. 길거리에서 풍기문란죄로 잡혀가기 싫다면 입을 수 없다. (잡혀가고 싶으면 입어도 된다) 날을 잡아 모두 풀었다. 뜬 지 한참이나 지났고 세탁도 여러 번 한 옷을 푸는 건 처음이었다. 풀어내는 데에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 역시 처음 느꼈던 실의 감촉과는 사뭇 달랐다.      


부드럽고 하늘거리던 실은 많이 해졌고 단단해졌고 뻣뻣해졌다. 면접에 합격해 설레던 인턴이 모진 회사생활을 견뎌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전과 같이 4.5mm 바늘로 작업했다가는 미운 옷이 나올 것 같아 5mm 바늘을 들었다. 고무단은 4mm 바늘을 이용했다.    

  

같은 실을 사용하는데 바늘이 커졌으니 편물은 느슨해진다. 코와 코 사이 간격은 넓어질 거고 이음새가 헐렁한 옷이 될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시스루 니트로 만들면 어떨까. 비침도 디자인이니까! 


가장 만만한 꽈배기 무늬를 넣고, 뒷면부터 뜬 후 어깨 코를 주워 앞면으로 내려왔다. 팔 넣을 자리를 적당히 지나면 앞뒤를 이어 원하는 길이까지 원통으로 뜨면 된다. 역시나 이번에도 도안은 없고, 대충 머리로 재단해 떠줬다.      



뜨는 중에 진행 정도를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는데, 편물이 반짝거렸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유리알 같은 빛이 난다. 원래 이런 빛이 나진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 해진 실에도 좋은 점이 있나 보다. 그래서 나는 이 니트를 유리알 니트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직 진행 중인 옷이지만 주인은 정해져 있다. 대학 동기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어라, 그러고 보니 새 실이 아니라서 기분 나빠하려나.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는데. 선물하며 설명해 보고, 불편해하는 기색이 있다면 빠르게 회수해야겠다.      


동기는 햇수로 8년 만난 사람과 얼마 전 헤어졌다. 사랑과 이별의 깊이가 숫자와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4년 만난 연인과 헤어졌던 슬픔을 생각하면 동기는 얼마나 심란할까, 하는 걱정이 된다. 이 옷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만든 옷을 선물하겠다는 나만의 작은 프로젝트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받는 사람이 부담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나는 핸들이 고장 난 8톤 선물 트럭, 연쇄선물마다. 


*사용실은 필 루스티크. 면 65% 레이온 25% 린넨 10%가 섞인 혼방사다. 근데 이제 세월과 세탁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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