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계절 Apr 02. 2024

T형 인간에게 수제 옷을 선물한다는 건 : 꽈배기 조끼

백씨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가장 자주 만나는 친구다. (참고로 백씨의 성은 백이 아니다. 근데 백씨로 적어달란다. 이유를 모르겠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나 햇수로 15년 차 친구인데, 중간에 연락이 끊긴 적도 소원해진 적도 싸운 적도 없다. 놀랍도록 비슷한 성향을 기반으로 소개팅 어플 같은 곳에서 자동으로 매치해준 사람 같다. 실용보단 미학, 감정보단 논리, 유흥보단 지적 허세를 원하는 흔치 않은 사람이다. 중요한 건 큰 카테고리는 공유하되 세부 사항이 다르다는 점이다.      


난 소설을 즐겨 읽고 백씨는 정보 서적을 주로 읽는다. 나는 서양 철학을 좋아하고 백씨는 동양 철학을 더 좋아한다. 난 뜨개를 하고 백씨는 도예를 한다. 우아 떠는 취향처럼 적어놨지만 철학에 관해 얘기하다가도 세상 유치한 농담이나 따먹으며 깔깔거린다. 대충 비율로 따지자면 진지한 주제가 1, 거기서 파생된 헛소리로 웃는 게 9를 차지한다. 그 헛소리가 서로 너무 재밌어서 문제다.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마중 가고, 이유 없이 매일 연락을 나누며, 다른 곳을 갔다가도 서로 좋아할 것 같은 물건이 있으면 굳이 사와 선물하는…… 어라? 이거 친구가 아니라 연인.... 아닌가? 이렇게 스윗한 친구가 있는 바람에 내가 연애를 못 하나 보다. (아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리가 둘 다 대문자 T형 인간이라는 것. 어디가 아프다고 말하면 적중률 100%로 병원에 가라는 말이 나온다. 그치 아프면 병원을 가야지. 병원을 가라는 말을 들으면 다른 한쪽의 대답은 둘 중 하나다. ‘어, 안 그래도 지금 가려고.’ 혹은 ‘그 정도는 아닌 듯?’     


단순하고 담백한 애정으로 이어진 관계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서로를 몰랐던 기간보다 알고 지낸 기간이 길어질 줄이야. 사실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백씨와 함께 카페에 있다. 나는 글을 쓰고 백씨는 혼자 휴대전화를 만지고 있다. 분명 어제도 만났는데 오늘 또 만났다. 조금 징그럽다.       


어쨌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므로 이번 백씨 생일엔 직접 뜬 옷을 선물하기로 마음 먹었다. 수제 옷이라는 건 친밀도가 낮을수록 부담스러운 선물이 되므로 상대를 잘 봐가며 선물해야 하는데, 백씨에게 그런 고민은 필요 없지. 암!     


이번에도 도안은 없었고 대충 머릿속에서 꽈배기 조끼를 떠야겠다는 구상만 했다. 에어울 라이트그레이 2합과 출처 불명의 베이지 색상 중고 실을 합사해 4mm 바늘로 작업했다. 몸통 고무단부터 시작하는 바텀업 방식으로 떴는데, 앞판 뒷판을 따로 떠 나중에 이어줬다. 여전히 매트리스 스티치를 잘 이해하지 못한 탓에 내 맘대로 바느질했는데, 그래도 얼렁뚱땅 무도안 작업 중 처음으로 풀지 않고 한 번에 완성했다!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기껏 작업한 편물을 풀어내고 다시 뜨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았던가. 이제 나도 뜨개 고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나!     



그럴 리가 없다. 전에 떴던 기본 브이넥 디자인에 꽈배기 문양만 넣었으니 당연히 능숙하게 뜨는 게 맞았다. 당시 옷을 완성하고 나서는 이 당연한 사실을 곧장 깨닫지 못했지만 그때만큼은 잠시 행복했으니 됐다.      


백씨의 생일은 12월 중순이지만 옷은 말일에 선물했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늦게 만들어서다. 이 과정에서 선물이 늦게 줄 수밖에 없다는 걸 백씨에게 말해야만 했고 서프라이즈 선물은 물 건너갔는데, 백씨는 참 백씨답게 말했다. 아래는 백씨 생일에 나눈 대화다.     


나 : 생일선물로 조끼를 떴는데 완성을 못했어 슬프다

백씨 : 천천히 해. 굉장히 정성 넘치는 선물이야 그리고

나 : 저번 주부터 떴는데 완성을 못 할 줄이야

백씨 : 시간이 매우 촉박한.... 일주일 만에 뜰 수 있는 거야?

나 : 내 예상에는 그랬어. 실패...

백씨 : 실력 많이 늘었네 진짜 속도 엄청 빠르다

나 : 다음 주 중에 줄게...

백씨 : 기대할게     


몇 번이나 검수하며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옮겨 적었다.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는데 다 적고 나서 알았다.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에 가까워서 게임 캐릭터가 자동으로 나누는 대화 같다. (심시티 주민들이 이렇게 대화했던 것 같기도 하다) 원래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소설 지문처럼 말하나? 일단 난 백씨와 말할 때만 이렇다. 다른 사람들과 말할 때 불편하다는 건 아니지만 백씨와의 대화에는 정제된 단어와 표현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두루뭉술하게 넘기는 말 없이 적확한 단어를 찾으려 때때로 사전을 찾아보는 것도 백씨뿐이다.      


백씨는 실물로 조끼를 받은 날 오! 하는 짧은 감탄사와 앞에서 했던 칭찬 몇 마디를 전했고 잘 입겠다는 인사로 소감을 마무리했다. 정말 간결하고 백씨다운 감사 인사였다.      



보잘것없는 이 에세이에 지대한 관심을 보내주는 백씨는 조끼 사진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는 사진의 배경으로 무려 놀이공원을 골랐다. 집에서 편도 두 시간 거리인 롯데월드까지 가서 놀이기구를 기다리며 찍는 옷 사진이라니. 이게 광기가 아니면 무엇이 광기인가. 슬금슬금 줄어드는 대기 줄 속에서 조끼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이 웃겼고 내 생각보다 백씨에게 조끼가 잘 어울렸기 때문에 두 배로 웃겼다. (선물한 지 삼 개월 만에 착의 모습을 처음 봤다)     



기다리던 열기구 모양 놀이기구를 타며 언젠간 진짜 열기구를 타자고 약속했다. 체력 부족으로 다섯 시간 만에 나오긴 했어도 롯데월드는 재밌었고 누구 하나 볼멘소리 내지 않아 기분 좋게 돌아왔다. 재밌었다!     


아직 작년에 약속한 뜨개구리 친구를 못 떠줬으니 조만간 백씨를 위한 뜨개가 한 번 더 있을 예정이다. 그때도 앞에 두고 헛소리 재잘대면서 만들어야지. 재밌겠다!     


+ 여담으로 오늘 백씨와 나눈 메시지가 너무 웃겨서 덧붙인다.     


백씨 : 나 우산 없어...

나 : 뭐...? (날씨 검색)

백씨 : 지금 비 와...

나 : 이런 날에...

백씨 : 나오고 깨달았어

나 : 우산이 없어...?

백씨 : 응 없어..

나 : 하지만 다시 들어가기엔 늦어버렸구나

백씨 : 비 맞으면서 정류장까지 뛰어옴 

나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백씨 : 조금? 비참했어

나 : 이따가 수업 끝나면 더 많이 올 것 같은데요... 어떡해요?

백씨 : 그러게요...?

나 : 데리러 갈까?

백씨 : 우와 조금 기다렸어

나 : ?

이전 02화 승려복 아닙니다 : 부클 조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