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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절 Apr 02. 2024

승려복 아닙니다 : 부클 조끼

진짜 아님

유종의 미 같은 건 어디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줘버렸대도 믿을 2023년이 지나고 24년이 막 되었을 때다. 여러 개인사가 겹쳐 참 비루하게 시작한 24년 1월 1일에는 도저히 새출발이라는 희망찬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23년에는 무슨 새해 목표가 있었나, 일기를 뒤져보니 이렇게 남겨져 있었다. 


1. 건강하게 5킬로그램 감량하기

2. 다음 소설 완고

3. 남자친구와 여행가기

4. 한 달에 3권 이상 독서     


자. 이게 얼마나 완벽하게 실패했는지 하나씩 뜯어보자. 

우선 1번. 단순 수치로만 본다면 11kg 정도 감량한 건 맞다. 하지만 건강한가, 묻는다면 글쎄. 20대 여성이 8개월 동안 생리를 하지 않았다는 점과 (당연히 임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각종 소화 장애를 겪는 중이라는 것만 봐도 건강하다고는 말 못 한다. (근데 건강하지 않다는 거지 아프다는 건 아니다.)     


2번. 소설 완고. 초고도 못 끝냈다. 3만자 정도 쓰던 중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는 충격에 빠져 그대로 손을 놔버렸다. 분명 머릿속에서는 날 헤밍웨이나 조지오웰 반열로 올려줄 엄청난 작품이었는데 막상 손끝으로 나오니 별거 없는 습작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3번. 헤어졌다.     


4번. 한 달에 3권을 읽었던 달도 있지만 한 권도 읽지 않은 달도 있다. 시에서 주관하는 독서마라톤도 참여해 조금의 강제성을 부여해 봤지만 그나마도 처음 설정한 쪽수는 달성하지 못해 마지막에 한 단계를 낮춰 억지로 완주했다.      


이 엉망진창 목표를 보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지난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나를 보며 ‘그래도 내가 쟤보단 낫지!’ 하는 원초적 위로를 얻었다고 할까. 문제가 있다면 ‘쟤’를 맡은 것도 나라는 점이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제 새로운 목표를 세울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는가. 게다가 실패했던 데이터베이스가 있으니 참고해서 더 완벽한 수립이 가능하겠다. 그렇게 탄생한 내 올해 목표는 이렇다.     


1. 크게 아프지 않기

2. 외로움 타지 않기

3. 초고 완성하기     


굉장히 단출해진 느낌이 들겠지만 실은 더 어려운 목표다. 아프지 않으려면 꾸준히 건강을 돌봐야 하고 외로움을 타지 않으려면 바쁘게 살아야 한다. (내 경우엔 그렇다) 초고는.... 폴더 속 폴더 속 폴더에 넣어둔 시간이 오래 지난 나의 글을 꺼내 마주한다는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기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 이제 이 모든 계획의 시작으로 무엇을 해야 하냐면, 바로 뜨개다.     


시작이 반이니 계획을 세웠으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보다 건강에 중요한 건 없지 않겠는가. 심신을 안정시키는 뜨개야말로 바람직한 신년을 위한 첫걸음이다.      


되지도 않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실을 고르는데, 마침 생일이 코앞인 친구까지 나타나니 이건 정말 바늘을 잡으라는 계시가 아닐까. 머리로는 당장 몸뚱이를 일으켜 운동해야하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새 실과 바늘을 사러 뜨개샵으로 향하는 나. 제법 멋지(지 않)다.      


꽤 오랜 기간 리뉴얼 공사 중이었던 바늘이야기 파주본점으로 갔다. 어떤 실이 유행인가, 어떤 도안이 새로 나왔나 보는데 얼마 전 다른 사이트에서도 봤던 부클실이 딱 눈에 들었다. 같은 시기에 여러 곳에서 비슷한 도안을 내놓은 걸 보니 아무래도 이번 분기 유행인가 보다. 양털을 벗겨 그대로 뭉쳐놓은 것만 같은 복슬복슬한 형태에 갓 구운 빵과 같은 색감. 좋아, 이번엔 이거다. 한 번도 안 떠본 실이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울 50%, 아크릴 25%, 나일론 25%의 ‘도톰 부클’이라는 실을 사용했다. 처음 써보는 실이라 게이지를 먼저 냈는데 7.5mm 대바늘 기준 10cm에 13코 15단이 나왔다. 이 말은 한 코가 굉장히 크다는 말이고, 코가 크다는 말은 같은 길이를 뜨더라도 다른 실보다 적게 뜨므로 빨리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침 이 옷을 받을 친구와의 만남이 약 3주 정도 남아있었으므로 아주 넉넉하다고 믿었다.      


기본 조끼 형태로 뜨되 품을 넉넉히 만들어 다른 옷 위에 걸쳐 입을 수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조금 넉넉한 길이로 뒷판을 잡아 뜨기 시작했는데, 이건.... 포대자루? 색상 넘버 2번 오트밀을 사용했는데, 내 생각보다 더 크게 떠져 도저히 옷이라고는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나왔다. 정갈한 사각형 모양의 뒷판이 나와야 하는데 어디 공사장에서 쓰고 버린 시멘트 자루처럼 생겼다. 크기가 문제인가 색이 문제인가 고민하다 (둘 다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색은 되돌릴 수 없으니 크기나 줄여보자며 전부 풀고 다시 코를 잡았다. 그래도 초반이니 이 정도 풀어내는 건 괜찮다고 위안하면서.      


3분의 1을 줄인 뒷판에 만족하며 양어깨 코를 주워 앞판으로 넘어오는 중이었다. 이상했다. 왜 비대칭이지? 오른쪽 어깨가 왼쪽 어깨보다 한참 밑으로 잘못 내려와 있다. 똑같은 수로 코를 줍고 똑같은 단을 떴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다시 풀고 떴더니 고쳐졌다. (아직도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고쳤다) 그랬더니 이번엔 넥라인이 너무 밑으로 내려갔다. 이대론 단추를 달아도 별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위가 너무 파여 제대로 어깨에 걸쳐져 있지 않을 것 같았다. 별수 없이 다시 풀었다. 이번엔 양쪽을 전부 풀고 다시 떴다.      



마무리하기 전 내가 입어보고 다른 친구에게 어떤지 물었더니 승려복 같단다. 너무하네. 이 옷에는 도를 닦는 숭고한 정신 같은 건 전혀 없으니 승려복에 비하는 건 승려복을 욕하는 말이다. 이건 그냥 ‘내가 널 이만큼이나 우정해!’ 말하고 싶은 어느 사람이 만든 뜨개옷이다.     


선물 받을 친구는 나보다 몸집이 작기 때문에 내 몸에 딱 맞게 만들면 그 친구에겐 품이 넓은 오버핏이 되겠지, 하는 얼렁뚱땅 계산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암홀이나 총장 같은 세부 길이는 모른다. 도안도 없이 눈대중으로 만들다 보니 아무래도 디테일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마감해야 할지 몰라 주먹구구식으로 바느질하거나 억지로 코를 늘리고 줄였는데, 부클실이 아니었다면 분명 티가 났을 거다. 입고 벗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만든 사람만 아쉬운 그런 결점들. 어쨌든 친구와 만나기 전날 딱 완성했고 세탁까지 마쳐 선물했다.      



앞구르기하며 봐도 술집인 장소인 걸 알지만 친구에게 옷을 입히고 찍은 사진이 이것뿐이라 어쩔 수 없이 이 사진을 올린다. 샤랄라 프릴 달린 원피스를 입어놓고 내가 선물하니 당장에 입어주는 친구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날 친구는 집에 갈 때까지 저 조끼를 벗지 않았다. 고마웠다.      


비록 처음 계획했던 주머니나 예쁜 단추를 달지는 못했지만 친구도 나도 만족했다. 다만 다음에 또 부클 조끼를 만들고 싶을 때가 온다면, 잘 제도한 도안을 보고 뜨겠다. 혹시 몰라 본문 마지막에 참고용 뜨개 도안을 남긴다.     


아무 이유나 말하긴 했지만 새해 첫 뜨개를 마치고 나니 진짜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유 없이 울렁거리고 파도치던 마음이 조금은 잠잠해지니 어쩌면 편물을 모두 풀고 다시 뜨는 과정이 마음을 단련하는 과정인가 싶기도 하다. 우스갯소리로 시작한 '건강을 위한 뜨개'를 계속 이어나가야겠다. 


*바늘이야기 하이랜드 알파카 부클 더플 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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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실니트 양떼목장베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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