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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절 Apr 02. 2024

돌아왔구나 뜨태식이

작년 10월을 마지막으로 잠시 접었던 뜨개가 기어코 다시 내 삶으로 돌아왔다.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계획적이었으면 좋겠다는 허황한 꿈을 가지고 사는 태생이 무계획한 사람으로서, 바늘을 놓은 것도 다시 잡은 것도 당연히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지속할 뜨개라면 어떤 형태로든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바람직한 취지로 시작했던 지난 뜨개 에세이 –분노와 낭만의 뜨개일지-가 내 욕심 때문에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다. 정말 취미로서 뜨개를 즐기는 사람임을 망각하고 1주일에 하나씩 완성된 작품을 올리겠다는 바보 같은 욕심을 부렸다. 


뜨개가 업이거나 손이 정말 빠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는 본업을 해야 하고 남는 시간에 뜨개를 하는데다가 손도 느린 사람이기에 당연히 가능할 리가 없었다. 목표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주에는 예전에 떴던 옷이며 가방이며 꺼내와 어떻게든 한 편을 올렸지만 원래 에세이를 시작했던 취지와는 사뭇 달라진 글과 내 모습을 보며 이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과거의 작품을 올리고 나면 기록을 남겼다는 뿌듯함보다 겨우 때웠다는 좌절감이 더 컸다. 


어쨌든 <분노와 낭만의 뜨개일지>는 제목 그대로 분노와 낭만을 남기며 잘 마무리했다. 즐겁기만 했던 뜨개에 마감이라는 페널티가 주는 파장이 생각보다 컸는지 이후로 실과 바늘을 멀리했지만 말이다. 박수칠 때 떠나는 게 아름답다지만 나한테 박수 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왜 떠난 거야. 


그리고 겨울이 왔다. 사계 내내 즐길 수 있다지만 역시 뜨개 제철은 겨울이다. 분기마다 수산시장에 매대에 깔리는 제철 생선이 바뀌듯 뜨개샵에서는 도톰하고 폭신한 제철 실을 꺼내 진열한다. 마침 눈까지 휘날리며 겨울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던 날. 원래라면 책만 반납하고 그대로 나왔을 도서관에서 눈이 그칠 때까지만 잠시 앉아있기로 했고, 의자 바로 옆 책장이 청구기호 500번대의 기술과학 서적이 모여있는 책장이었고, 하필 내 눈높이에 곧장 들어온 칸은 뜨개 서적이 모여있는 칸이었다.


하필과 우연이 만나 홀린 듯 뽑아 든 책 표지에서 포근한 아란 스웨터를 입은 모델이 종이 너머에 있는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고보니 아란스웨터 하나 떠입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었는데. 아, 다시 바늘을 잡을 때가 왔구나! 여전히 내리는 눈을 헤치면서 속으로 실부터 가늠했다. 새 실을 산 지가 오래된 터라 옷을 뜰 수 있을 정도의 실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실을 구매했고 서둘러 집에 온 사람치고는 실이 없어 머쓱해져 일찍 잠들었다. 의욕이 계획을 앞지르느라 이런 일이 잦은 편이다. 


기껏 돌아온 뜨개 생활에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나는 되도록 뜨개를 지겨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란다) 낭만을 포기하기로 했다. 멋들어지게 한 주에 하나씩 새로운 작품을 떠내면 보는 이들에게 훨씬 다채롭고 많은 종류의 작품을 보여줄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내가 먼저 지쳐 떨어지게 된다는 걸 배웠으니 바꾸기로 했다. 완성하면 완성하는 대로, 못 하면 못하는 대로 솔직하게 쓰기로 한다. 


대신 더 웃기게 쓰기로 했다. 나는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지만 누군가 내 말에 웃어주면 짜릿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른바 내적 관종이라고 할까. 괜히 멋들어진 문장으로 섣불리 감동을 주려는 것보다 솔직하게 써서 웃음을 주는 게 더 나답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한나절 내내 고민해서 쓴 글보다 한 시간 동안 휘뚜루 써낸 글이 더 반응이 좋을 때가 많다. 


수천수만의 취미 중 뜨개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지 몰라도 재미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 굳이 뜨개에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한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것 마냥 뜨개에 관심을 갖게 만드려는 속셈도 있다. 어느 지역에서는 아무도 참가하지 않는 젓가락 대회도 연다는데 뜨개에 관심 갖는 사람이 많아지면 뜨개 축제 같은 게 행사로 열릴지 누가 아는가. (소규모 프리마켓이나 아트페어에 참가하는 뜨개 부스 말고 진짜 뜨개만 다루는 큰 축제. 만약 이미 있다면 알려주시라.)


쓰고 보니 이번에도 내 그릇보다 큰 목표를 가지고 시작하는 꼴이 되었다. 그릇이 깨지면 새 그릇을 만들면 된다. 그러니 모두 내 그릇이 깨질 때까지 글을 즐겨주시라.      



*표지 사진은 바늘이야기 연희점에 전시된 소품입니다.

*<분노와 낭만의 뜨개일지>와 이어지지 않는 개별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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