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계절 Apr 04. 2024

17인치 노트북에도 꼬까옷을 달라 – 모티브 파우치

마냥 웃긴 뜨개일지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 뭐냐고 묻는다면 당연지사 노트북이다. 일찍이 데스크톱을 정리하고 노트북 생활로 접어든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지금 쓰는 노트북은 만으로 3년을 함께한 친구다.      


휴대전화 기종 ‘갤럭시 S22 울트라’와 군용 가방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는가. 바로 크다는 거다. 답답한 걸 못 참는 성정이라 시원하게 넓은 화면을 좋아하고 보부상 마냥 한껏 짊어질 수 있는 큰 가방이 좋다. 같은 논지로 노트북을 살 때도 크기가 첫 번째 고려사항이었다.      


무조건 오른쪽 숫자 패드까지 달린 넓은 자판과 꽉 찬 화면이 있어야 했다. (이래놓고 노트북 자판이 불편해서 따로 키보드를 구매해 사용 중이다) 굳이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키보드 배열이 좁으면 내 큰 손을 감당하지 못해 오타가 자주 나고, 화면이 작으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족히 보는 영화나 드라마에 몰입이 안 되니까.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무겁다. 이전 7년간 쓰던 노트북은 정말 말도 안 되게 무거워서 마음대로 들고 다닐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엔 가볍다는 기종을 추천받아 샀는데도 그리 가볍지 않았다. (참고로 LG 그램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잘만 들고 다니긴 한다. 조용한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작업하기를 좋아해 어쩔 수 없다. (콘센트는 쓰지 않으며 두 시간마다 새 음료를 주문한다) 그렇게 쓴 글로 여러 공모전에서 좋은 성과도 얻었다. 아직 미완인 혹은 완성했지만 공개되지 않은 수많은 글이 잠들어있는 (적어도 내게는) 귀한 노트북이다.      

중요한 건 내부 데이터지 외관이 아니다 보니 신경도 덜 쓰게 된다. 너무 험하게 들고 다닌 탓인지 긁힌 자국이며 검댕이 묻어 버렸다. 아무리 나라도 이건 좀.... 하는 상태다. 이참에 노트북 파우치를 하나 장만해야겠다 싶어 찾아보는데 어쩜 이런가.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대단한 디자인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에 돈을 쓰는 것도 싫다.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물건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결국 새 물건을 찾게 되는 법이다. 이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어느 사슴 무늬 도안!      


아무도 몰랐겠지만 원래 이번 화 제목은 ‘사슴 파우치’였다. 이게 그냥 모티브 파우치로 바뀌었다는 건 사슴 무늬 뜨는 걸 실패했다는 뜻이지. 특별하진 않다. 실패가 일상인 걸.     


구독 중인 뜨개 유튜버가 커뮤니티 글로 사슴 도안을 공유했고, 나는 그걸 커다란 파우치로 만들 생각이었다. 굳이 비싼 실을 쓸 필요도 없어서 다이소에서 실을 골라왔고 쑥쑥 뜨기 시작했다.      


처음 계획은 코바늘로 노트북 가로 길이만큼 사슬코를 잡아 빙글빙글 돌아가며 큰 파우치를 만드는 거였다. 단순하게 작은 사이즈를 뜨던 방식 그대로 콧수만 늘려 크게 만들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얼추 길이를 맞춰 사슬코를 잡고 반쯤 뜨고 나서야 이상한 걸 알았다. 탄성 있는 실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떴더니 편물이 단단해졌고 처음보다 작아졌다. 시작할 때 길이를 잰 건 아무 의미 없었다. 내 손에 들린 건 노트북을 부수지 않는 이상 절대 집어넣지 못하는 딱딱한 실뭉치였다. 근데 이제 규칙적으로 짜임이 있는 실뭉치.     



별수 없이 모두 풀고 애초에 넉넉한 길이로 다시 사슬코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또 풀었다. 왜냐면! 또! 작았으니까! 분명 길이를 계속 확인하면서 떴는데 어떻게 작을 수가 있지? 이번엔 노트북이 들어가긴 했는데, 파우치를 억지로 잡아 늘여야 겨우 넣을 수 있었다.      



2번째 풀던 와중에 급하게 사진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찍어놨다. 사실 이번 작업을 만만하게 봤던 터라 ‘푸르시오’를 하게 될 줄 몰랐기 때문에 이때부터 멘탈이 흔들렸다. 도안도 있고 어려운 기술이 들어가지도 않는데 이렇게 고심하게 될 줄이야.      


같은 방법으로 다시 시도하자니 이미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대바늘로 해봐야 하나. 대바늘 배색은 코바늘보다 까다로운데. 일단 어떻게든 떠보겠다는 마음으로 대바늘로 작업해봤는데 딱 4단 뜨고 접었다. 배색 코가 균일하지 않아 편물이 예쁘지 않았다. 코가 고르고 일정해야 배색 무늬가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럼 이제 어떡할까? 바늘을 바꿔봐도 콧수를 바꿔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냥 도안을 포기했다. 절반 정도 떴을 때 보니 사슴이 크게 박혀있는 모습이 생각만큼 예쁘지 않더라, 하는 합리화와 함께 깔끔하게 포기했다. 저 사슴은 나중에 다른 곳에 넣어보겠다. (언젠가 꼭 넣겠다)     


이미 상한 마음을 달래려면 내 손으로 뜨긴 해야 하는데. 이미 실은 잔뜩 사놨으니 말이다. 그래서 쉬우면서 그럴듯한, 코바늘의 기초, 모티브 뜨기에 돌입했다. 왜 이전에는 ‘시작’했다고 했으면서 모티브는 ‘돌입’이냐면 난도가 낮은 대신 인내심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코바늘 모티브란 어느 규칙에 따라 만든 작은 편물 조각을 말하는데, 모티브를 여러 장 이어 붙여 가방부터 옷까지 다양하게 만들곤 한다. 검색창에 코바늘 모티브까지만 입력해도 연관 검색어에 다양한 작품이 뜰 거다.      


다만 작은 조각을 ‘여러 장’ 만들어야 하다 보니 내가 완성해야 할 작품 사이즈에 따라 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내 모티브는 가로세로 8cm의 정사각 모양이었는데, 노트북이 들어가려면 한 면에 20장이 필요했다. 근데 파우치는 양면을 만들어야 하니까 40장. 와! 모티브 40장!     


사슴을 포기한 대가로 모티브 40장을 뜨게 됐지만 한 장의 크기자 작으니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앞서 뜨고 풀기를 반복한 게 일주일쯤 됐는데 모티브 40장 뜨는 건 하루 걸렸다. 내다 버린 일주일......   

  

 

여차저차 만만하게 봤다 큰코다쳤던 노트북 파우치 완성이다. 뜻하지 않았던 고충 2개 중 하나가 3번의 푸르시오, 였다면 하나는 바느질이었다. 조각조각 모두 이어붙여야 한다는 건 모든 모서리에 바느질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딱 10장을 이었을 때 글루건으로 다 붙여버리고 싶었는데 겨우 참았다. 덕분에 바느질이 싫어 꺼려왔던 모티브 작업에 요령이 생겼다.      


나는 하기 싫은 건 될 수 있으면 피하는 사람이다. 하면 된다, 가 아니라 되면 한다! 쪽에 속한다. 어쨌든 반복된 실패로 나는 모티브 잇기라는 스킬 하나를 배웠고 할 수 있는 작업의 폭이 넓어졌다. 이제 언젠가 사슴 무늬가 쾅 박힌 옷이든 가방이든 만들면 정말 후련하겠다. (시슴... 시슴을 조심하십시오)



이전 03화 T형 인간에게 수제 옷을 선물한다는 건 : 꽈배기 조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