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웃긴 뜨개일지
작년 내가 한 일 중 가장 후회되는 일 세 가지 중 하나는 무선이어폰을 팔아버린 일이다. 나머지 두 개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한 달이나 사귄 것, 그리고 술을 진탕 먹고 침대에 토한 거다. 숙취에 절어있는 몸으로 이불과 베개를 빠느라 몇 번이나 헛구역질했던 걸 생각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
선천적으로 귀가 약해 원래 이어폰을 잘 쓰지 않았는데 갤럭시 버즈를 선물 받고는 한참이나 잘 썼다. 선을 연결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부드러운 음질로 끊김 없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니! 과학 만세를 외치며 왕복 두 시간이 넘는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영화를 봤지. 코앞에서 다른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지옥철에서 선 꼬임 없이 이어폰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지.
그러다 남자친구에게 차이고 –좋아하지 않는데 사귀었다던 그 사람 아님- 술 먹다가 버즈 한쪽을 잃어버렸다. (침대에 토한 날이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열심히 이불 빨래를 끝내고 카페 가는 길에 케이스를 열었더니 왼쪽이 없더라. 다행히 나 같은 칠칠이를 위해 뛰어나신 개발자들이 만들어둔 기능이 있다.
내 기기 찾기! 미리 등록해놓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다. 어플에서 알려준 내 왼쪽 버즈의 위치는 우리집 근처 어느 아파트 단지였다. 집까지 걸어오는 경로에서 많이 비껴간 위치인데 어쩌다 거기 있는 건지.
당장 달려가 단지를 맴돌며 바닥을 훑어봤지만 찾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게 어플은 대략적 위치를 알려줄 뿐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 확인할 순 없었고 만약 누군가 주워들고 아파트로 들어갔다면 몇 층인지도 알 수 없다. (떨어진 이어폰 한쪽을 누가 줍겠냐마는)
그래서 팔았다. 오른쪽만 꽂고 다니니 성에 차지 않았고 잃어버린 쪽만 중고로 사자니 하나에 5만 원이라는 가격이 비합리적으로 보여 그냥 팔아버렸다. 그러지 말걸. 5만 원만 쓰면 다시 완전한 무선이어폰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냥 쓸걸. 후회해도 이제 내 손에는 직접 뜬 케이스 커버만 남았다.
최근 일하는 곳이 바뀌며 집과 제법 가까워졌는데, 이 정도면 걸어갈 만하다 싶어 걷고 있다. 거리는 약 4km. 체력이 모자랄 즈음 집에 도착하니 딱 좋았다. 비 오는 날에도 해가 쨍한 날에도 가리지 않고 걷지만 이어폰 없이는 못 걷겠더라. 심심해서.
활동 시간을 늘리자는 건강하고 건실한 목적도 결국 재미없으면 못 한다. 다리는 움직여야 하고 눈은 전방주시를 해야 하니 남은 자극 수용기관은 귀다. 좋아하는 노래를 미리 플레이리스트에 짜놓고 마음속으로 혼자 열창하다 보면 한 시간 동안 걷는 건 쉬운 일이 된다. 가끔 흥에 겨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 내는 건 주의 필수. 주로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이매진 드래곤스 노래 들으면서 둠칫둠칫 걸어가는 편이다.
전에 쓰던 버즈를 사자니 당장 십몇만 원을 지출하긴 아까워 줄 이어폰으로 샀다. 뭐야, 유선 이어폰이 역시 음질이 더 좋은 것 같은데? 이 좋은 걸 두고 굳이 왜 무선 이어폰을 썼더라? 며칠 지나고 알았다.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가방에서 저들끼리 꼬이는 선, 이어폰을 꽂으면 충전기를 꽂을 수 없는 단일 단자 같은 이유들. 그중에서 제일 화나는 건 꺼낼 때마다 고무 이어팁에 잔뜩 묻어있는 먼지들이다.
가방을 아무리 털고 정리해도 이상하게 이어팁에 먼지가 자꾸 붙었다. 고무라 잘 떨어지지도 않고 매번 떼기도 귀찮고. 그래. 무선이어폰들은 저마다 케이스가 있었지. 다른 문제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먼지 정도는 막을 수 있겠다 싶어 오늘도 바늘을 들었다. 케이스가 뭐 별건가. 집어 넣을 수만 있으면 되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만들면 된다. 나는 뜨개인이니까!
이왕 뜨는 거 예쁘게 만들고 싶어 도안을 좀 찾아봤다. 정말 많은 영상과 도안이 있었지만 체크 무늬를 사랑하는 내 눈에 쏙 들어오는 디자인이 있어 곧장 실을 준비했다. (참고한 영상은 숩니공방의 체크무늬 가방만들기 영상이다. 같은 디자인의 큰 사이즈 가방 만들기도 있으니 관심 있다면 도전해보시라)
흰색은 다이소 면사와 하이소프트와 슬로우스텝, 초록색은 다이소 면사와 하이소프트4ply를 사용해 각각 두 줄 잡고 떠줬다. 3.5mm 코바늘로 동일하게 작업했지만 실 종류가 달라 그런지 아주 살짝 규격이 달랐다. 신경쓰일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항상 파우치나 가방 종류를 만들 때면 닫는 방식을 고민하는데, 지퍼를 달기엔 바느질이 귀찮고 복조리 형식으로 만들자니 디자인과 안 어울린다. 다행히 아주 편리한 방식의 부자재를 발견해 쉽게 해결했다. 혹시 비슷한 고민이 있다면 다이소에서 파는 천 원짜리 수예용 금속 부자재를 추천한다.
퇴근하며 슬쩍 파우치를 꺼내 이어폰을 꽂으니 동료가 이렇게 말한다.
오,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라더니 일부러 줄이어폰 쓰시는 거예요? 파우치도 잘 어울려요~
아니다. 레트로가 유행인 줄도 몰랐다. 그냥 돈이 없어서 싼 이어폰을 쓰는 거다. 근데 그냥 유행 따라 쓰는 척, 그렇다고 답했다. 통장이 빈 것보다 알량한 자존심이 더 구린데. 스팅의 잉글리시 맨 인 뉴욕 (Sting – English Man In NewYork)을 들으며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차선책을 고르며 합리적 결정이라고 위안하는 모습이 좀 웃겼다.
어쩌면 이 파우치는 나이 먹고 마음대로 십만 원쯤 지출하기가 겁나는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용도가 아닐까 싶었다. 예쁜 포장지를 뜯으면 속에는 아직도 10년 전과 같은 줄 이어폰만 있는 현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