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다가, 식다가, 난 네가 돼버렸어
75km, 차로 한 시간 반. 그곳이 내 새로운 거처였다. 조용한 남학생이 살았다던 방은 깨끗했다. 먼지 하나 없이 텅 빈 게 마음에 들었다. 지난 1년 반, 빈 무언가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터였다. 모든 게 늘 가득 차 있었다. 나도, 내 방도.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상관없었다. 능동과 피동의 구분이 중요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무언가가 계속 채워지는 건 지겨웠다. 가끔 모든 게 높이 쌓인 낙엽처럼 느껴졌다. 쌓이고 쌓여 아래부터 썩어가는. 언젠가는 그 녹슨 생명들이 나를 휘감아 죽일 것 같았다. 그래서 위병소를 나올 땐, 농약이라도 뿌린 듯 가벼웠다. 이번에는 온전히 내 의지로 채울 생각이었다. 천천히, 썩지 않도록. 나도, 내 방도 그럴 것이었다.
가장 먼저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나섰다. 기왕이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여러 번의 수고 끝에, 음식점 주방 일을 얻었다. 내가 채운 첫 번째였다. 첫 출근 날은 붉었다. 낯설어하는 얼굴도, 뜨겁게 달아오른 냄비도 그랬다. 나는 내 붉은 얼굴과 냄비를 보며 황토 같다고 생각했다. 낙엽이 아닌 황토. 탄산칼슘이 많아 농사에 좋다는 황토. 그날 밤, 새싹이 나는 꿈을 꿨다. 붉은 황토 위 연둣빛 싹. 작고 연약한 그런 싹.
두 번째 출근 날에는 그 애를 만났다. 음식점 후기에 유난히 많았던, ‘알바생이 친절해요’에서 ‘알바생’을 맡고 있는 그 애를. 수많은 ‘어서 오세요’와 ‘감사합니다’는 그 말이 옳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어색함 때문에 수시로 붉어지는 내 얼굴을 옅게 만드는 장난들도 그랬다. 가까워진 뒤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때로는 영화를 보고, 때로는 술을 마셨다. 한 가지 이상한 건, 더는 어색하지 않은데도 그 애가 장난을 친다는 거였다. 대체로 '좋아한다'는 장난들을. 동갑이라서, 뜨거운 냄비를 잘 잡아서, 음악 취향이 맞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까워질수록 ‘-서 좋아’의 문장들은 점차 쌓였다. 너무 많이 쌓여 하마터면 밖으로 다시 뱉어낼 뻔한 적도 있었다. 그 애에게. 잠에 들 때쯤에는, 수북이 쌓인 문장들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새싹에서 꽃이 피었다.
두 달이 지났을 무렵에는 그 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어떤 성격인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어디 사는지 등등. 그리고 더 알게 된 게 있었다. 그 애는 나에게 어떤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애가 전에 사귀었던 사람들에 대한 것. 신기하게도 그런 사실들을 알았을 때는 항상 날씨가 흐렸다. 나는 흐린 날씨가 싫었다. 그래서 괜히 더 자주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면 흐린 날씨가 다시 흐릿해졌기에. 그래도 ‘-서 좋아’는 늘 새로 쌓였고, 이제는 자주가 아니라 매일 꿈에 꽃이 나왔다. 분홍빛 예쁜 꽃이.
유난히 화장했던 어느 날이었다. 그 애가 평소와 달랐다. 원래 손은 느리고, 말이 빨랐던 그 애였다. 그날은 반대였다. 화장품을 쥔 손이 빨랐다. 장난도, 인사도 잊은 듯 말은 없었다. 퇴근 즈음엔,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낼 새도 없이 사라졌다. 담배가 유난히 썼다. 괜스레 힘을 줘 비벼 껐다. 애처롭게 마지막 숨을 내뿜는 꽁초가 우스웠다. 쓰레기통을 찾던 내 눈에 그 애와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손을 잡고, 눈을 맞추는 두 사람이.
꽁초가 생각보다 긴 숨을 내뱉은 건지, 눈이 매웠다. 시야가 흐려 고개를 드니 따뜻한 햇빛 때문에, 선선한 바람 때문에 날씨가 흐렸다. 그날은 유난히 술을 많이 마셨다. 술병이 비어갈수록 꽃은 더 빨리, 더 많이 자랐다. 텅 비어있던 게, 다시 가득 찼다는 게 싫었다. 사실은, 늘 듣기만 했던 ‘-서 좋아’를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슬펐다. 아니 어쩌면 그 애가 내 안에 이토록 가득하다는 게 분했다. 또 그러다가 거기서 담배를 핀 내가 싫었다. 그래서 슬픔은 원망으로, 원망은 다시 슬픔으로 바뀌며 빈 잔을 채워주었다. '-서 좋아'의 문장들이 넘쳐, 자꾸만 술에 섞였다. 달고 썼다. 꿈에서는 꽃에 목이 졸렸다. 목이 졸리면서도 새빨간 잎 하나를 동경했다.
그 뒤로 나는 자주 냄비에 데었다. 손이 늘 붉었다. 늘 연고를 발라주는 그 애를 보며, 늘 웃어주는 그 애를 보며, 꽃이 잡초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시취와 함께 그것들이 모두 바스러질 것이라는 것도. 준 적도 없는 사랑을 받은 죄는 달콤했고 그에 맞게 끔찍했다. 가끔은 너무 많이 자라 구역질이 났다. 그럴 때면 농약이 생각났다. 비워 주려나. 웃음이 났다. 거울 속 나는 이제 잡초, 그것이었다. 얼굴에도, 머리에도, 어디에도 잡초뿐이었다. 아마 내일도 잡초 같은 그 애를 보리라. 그리고 그 애도 그 애를 보겠지. 잡초로 가득 찬 그 애를.
이번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아직 그 애를 잊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친구를 보고 있으니, 검정치마의 ‘맑고 묽게’가 생각났습니다. 친구는 매일 그 애 생각뿐이라고 하더군요. 참 그 애가 돼버린 것 같다면서요. 장난 같은 사랑도 사랑이겠지만, 그저 장난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요. '맑고 묽게'의 가사 한 구절과 함께 이만 줄입니다.
너를 위해 부서져 내렸던 나의 심장은
한 번도 망설인 적 없었지
난 니가 원한다면 뭐든지
다 할 거야
물보다 맑고 묽게 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