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영영 나타나지 않겠지만.
삶에 대한 질문은 다양합니다. 가벼운 호불호부터 어떻게 살 건지, 왜 사는지 같은 어려운 질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질문일수록 아주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과 아예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뉠 겁니다. 저 같은 경우는 후자입니다. 대체 왜 사는지 도저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늘 고민하지만, 늘 헷갈립니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이는 ‘기계 장치로 무대에 내려온 신’을 뜻합니다. 극 중의 사람들이 부조리한 삶에 염증을 느낄 때, 신이 등장해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사기 캐릭터’ 같은 존재입니다. 극 중 세계의 인과나 개연성에 영향을 받지 않고, 주인공을 도와주거나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때문입니다. 권선징악을 실천하며 사람들에게 삶의 이유와 의미를 찾아주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답을 주겠지요.
아쉽게도 저는 저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헤매고 있습니다. 그래도 알베르 카뮈의 철학을 접한 뒤로는 어떻게든 살아내려 노력 중입니다. 이 브런치 북도 그 노력의 하나입니다. 카뮈는 인간이 삶에서 확신할 수 있는 건 죽음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외의 모든 일은 무용한 일이 되는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은 죽음에서 비롯되는 부조리에 맞서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맞설 수 있는 걸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권태를 느끼며 끊임없이 살아내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건, 부조리를 느끼고 있다는 인식의 유지일 겁니다. 그걸 잊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다시 부조리를 새롭게 느끼며, 다시 절망하는 반복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조리의 감정을 수반하며 사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 하나에, 행동 하나에 절망이 담긴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조리를 망각하지 않으며, 그에 대해 절망하지 않으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그 방법을 사랑에서 찾았습니다. 추상적이지만 구체적이며, 연약하지만 단단한 사랑이라면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부조리에 대한 인식의 고통을 잠깐이라도 덜어주는 강력한 무기인 동시에 삶의 결말에 대한 착각을 부르는 감정이니까요. 그래서 브런치 북을 씁니다. 언젠가 했던 사랑, 누군가 했던 사랑을 수집해 쓰며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서. 또 읽어주시는 분도 저와 같은 감정을 느끼시기를 바라면서요.
복잡하게 썼지만 간단합니다. 사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가’에도 등장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랑이 있다.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힘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는 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쓸 겁니다. 우리 주위의 수많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이를 통해 저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살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프롤로그를 쓰고 있으니, 자연스레 언니네 이발관의 ‘산들산들’이 떠오릅니다. 가사 한 구절과 함께 글을 마칩니다.
많은 세월 살아왔지만
아직도 부족하지
그래서 난 가네
나는 나의 길을 가
소나기 두렵지 않아
구름 위를 날아 어디든지 가
외로워도 웃음 지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고 싶네
그게 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