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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외 Nov 23. 2023

문득. 윤지영

영원할 수 없어서 영원한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지난 연인을 새까맣게 잊을 정도로 좋다고. 불꽃 축제가 한창인 여의도에서였다. 터지는 불꽃이 심장 소리를 가렸다. 폭죽을 다른 말로 연화라고 한데. 그게 뭐, 그 애의 입을 막고 싶었다. ‘연기 연’에 ‘불 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불 화’를 ‘꽃 화’로 바꾸면, 봄의 경치라는 뜻이 된데. 봄의 경치. 분명 가을인데, 일순간 봄을 만진 착각이 들었다. 하늘엔 꽃들이 형형색색으로 타고 있었다. 지금이 봄이면 저건 무슨 꽃일까. 그 애의 입을 막으며 생각했다. 꼭 감은 눈이 떨렸다. 봄의 촉감이 가슴에 남았다. 우리는 그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빠르고 일정하게 터지는 폭죽 소리를.    


그 애는 오래 사귀었던 연인이 있었다. 5년을 꼬박 함께한 연인. 왜 헤어지자고 한 거지. 취하면 항상 그런 질문을 했다. 누구한테 하는지도 모를 질문이었다. 나를 취하게 하는 질문이었다. 스테인리스 앞접시에, 소주잔에, 테이블에 비춘 내가 우스웠다. 그래서 항상 그냥 웃었다. 불꽃놀이를 가기 전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연화의 뜻을 안 뒤로 그 애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낙엽 사이로 개나리가 피었다. 단풍 위로 제비가 날았다. 고마웠다. 높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제비를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일 테니. 그 애와 있을 때면, 그날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한 움큼 터지는 불꽃에 놀랐다. 가려줄 소리가 없어 걱정이 잦았다.


그 애와 나도 가끔은 싸웠다. 연락이 안 돼서, 바빠서, 소홀해서. 남들과 같은 이유였다. 싸우다가 가끔 그 애가 너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항상 그 (는)이 궁금했다. 나(는)이라면, (는)이 누군데. 그 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애에게 비교 대상은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는)에 갇혔다. ’ 나는‘의 주인은 항상 ’나‘가 아닌 (는)이었다. (는)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는)은 어떨까. (는)이 무서웠다. 시도 때도 없이 꽃을 짓밟고, 새를 죽이는 그게 싫었다. (는)에 갇혀 작아지는 나를 보는 건 숨이 막혔다. 언젠가 그게 나를 잡아먹으리라 믿었다. 그럴 땐 불꽃을 생각했다. 터지는 불꽃이 조여 오는 (는)을 막아주리라 믿었다. 나를 꺼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미안해. 나트륨이 노랗게 타올랐다. (는)이 밀려났다. 숨이 트였다. 불꽃놀이로 시작한 우리의 사랑은 그런 식이었다. 각각의 금속들이 각각의 색으로 타오르는. 미안해는 노란 나트륨, 사랑해는 붉은 스트론튬, 고마워는 파란 구리. 마지막은 모두가 함께였다. 한꺼번에 터지는 불꽃은 우리를 다시 여의도로 데려갔다. 따뜻했다. 여전히 폭죽 소리가 들렸다. 꽃동별이 끝없이 흐드러지며 내는 연기에 눈이 매웠다. 한참 그 애의 품을 적셨다. 그 애 안에 남아있는 (는)이 떠밀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터지는 폭죽에 놀라 도망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불꽃놀이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 애의 가슴에서 들리는 폭죽 소리가 멈추지 않기를.


그러나 (는)은 떠밀려 가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지겹게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지겹게 그 애를 괴롭혔다. 시발점도, 종착점도 없는 악순환. 우리는 거기에 빠져 있었다. 매일 사랑하고, 가끔 행복하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연락이 왔어. 그 애가 덤덤하게 말했다. 미안해. 불꽃이 튀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숨긴 말이 뭔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말해서), (떠날 거라), 또는 그런 일이 생기게 해서. 묻고 싶은데 묻지 못했다. 말이 젖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넘어갔다. 울컥울컥. 너무 궁금해서 그래, 한 번만 보고 올게. 그 애가 또 숨겼다. 뭐가 궁금한 걸까. (어떻게 지내는지), (왜 헤어진 건지) 또는 (왜 연락했는지). 계절이 성큼 느껴졌다. 그래서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애는 금방 돌아왔다. 사랑해. 빨간 불꽃이 일었다. 그냥 연락한 이유가 궁금했어. 무슨 낯짝으로 그랬는지. 시원하게 욕도 하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어. 형형색색의 불꽃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같은 리듬으로 뛰었다. 그러곤 한참을 울었다. 떨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애가 떠는 걸까. 그러나 그 애는 떨고 있지 않았다. 추웠다. 온기를 못 느끼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온기를 느끼는 그 애가 미웠다. 그 애는, 우리는, 영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영원해야 했다. 끝까지 숨어있던 (는)이 느껴졌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슬프도록 웃긴 일이었다. 그 애의 영원을 바랐던 내가 영원할 수 없다는 건. 얼마 안 가 그 애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헤어졌다. 영원을 바라서. 불안하고 싶지 않아서. (나)로 살고 싶어서. 꽃동별을 뒤로하고, 하늘엔 회색 상처가 피었다. 구름이 가려졌다. 조용했다. 끝이 났나 보다.


영원은 참 아리송한 말입니다. 물질계에선 불가능하며, 정신계에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의 근거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근거는 때로 완벽한 이유가 됩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요.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둘 중 무엇이든, 여러분과 행복을 모두 지키셨으면 좋겠습니다. 영원을 노래한 ‘문득’ 한 구절과 함께 글을 마칩니다.


나조차 지키지 못했던 맘인데 아직도
난 영원한 맘을 사랑하나 봐
이미 비에 젖은 마음도 좋아
우리가 바다로 걸어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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