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슬픔>, <오직 두 사람>을 통해 본 나르시시즘
오래전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 깊이 머물던 두 소설이 있다.
신경숙의 〈깊은 슬픔〉과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마주한 이 두 작품은 놀랍게도 같은 인물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상대를 서서히 지워가는 사람들.
〈깊은 슬픔〉에는 고향 친구인 은서, 완, 세가 등장한다. 은서는 첫사랑 완을 평생 그리워하지만, 완은 그녀의 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야망에 따라 방치하거나 이용한다.
또 다른 친구 세는 은서를 지독하게 사랑한다고 믿으며 곁을 지키지만, 실상은 그녀를 소유하고 통제하려 할 뿐이다.
은서와 결혼한 세는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그녀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정서적으로 외면한다. 결국 은서는 두 남자 사이에서 온전한 인간으로 이해받지 못한 채 고립 속에서 삶을 마감한다.
90년대에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형언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다.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다"는 해석이 폭력을 낭만으로 덮어버리던 시대였으니까.
〈오직 두 사람〉의 딸은 지적이고 매력적인 아버지와 세상에 둘도 없는 유대감을 공유하며 자란다. 하지만 아버지가 구축한 '우리만 아는 언어'는 사실 딸을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족쇄였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란 딸은 그 무게에 짓눌려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빼앗긴 채 시들어간다.
특히 충격적인 장면이 있다. 아버지가 연인과 여행을 떠나기 위해 그 연인의 아들을 딸에게 맡기는 것이다. 부모가 나를 사랑해서 하는 일이라는데, 자식 된 처지에서 그 애정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구조가 다르다. 〈깊은 슬픔〉의 완과 세는 동등한 관계에서 은서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삼았다. 반면 〈오직 두 사람〉의 아버지는 '지적인 고결함'이라는 권위로 딸의 세계를 수직으로 지배했다.
방식은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한 사람의 자아가 천천히 무너졌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 불편함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변한 것은 소설의 문장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나의 눈이었다. 같은 장면을 보면서도 이제는 다르게 읽힌다. 은서 곁에서 "너만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던 세의 눈빛이, 딸에게 "우리는 특별하다"라고 속삭이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안다.
안갯속을 헤매던 불편함이 명확한 자각으로 바뀌었을 때, 비로소 그 굴레에서 벗어날 힘이 생긴다. 결국 글은 자신이 겪어낸 삶의 두께만큼 읽히는 법인가 보다.
타인의 그림자에 갇혀 자신의 색을 잃어버렸던 젊은 날의 모든 은서들에게, 그 찬란했던 가짜 빛을 이제는 꺼버려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