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으로 가득했던 나의 첫 직장생활
2022년 2월.
대학 졸업생들이 여러 가지 갈림길을 앞두고 고민할 때, 나는 인천으로 무작정 상경했다.
무턱대고 넣었던 공공기관 계약직에 덜컥 합격하였기 때문이다.
월급은 최저 시급이었고, 10명 넘게 뽑는데 참석자가 15명 정도였으니 솔직히 거저먹기였다.
그래서, 남들이 좋은 기업에 합격해서 눈물까지 흘릴 정도의 감동이나 성취감 같은 건 없었다.
떨어지면 오히려 창피했을 정도의 경쟁률이었으니.
이렇게 자학할 정도로, 최저시급이나 다름없는 월급을 주는 공공기관 계약직에 지원한 이유는 뭐였을까?
보통의 졸업생들은 대기업 ~ 중견기업 서류부터 일단 넣어볼 것이다.
아무리 뉴스나 유튜브, 주변 선배나 지인들을 통해 취업시장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직 안 넣어봐서 다를 거라고 생각하니깐.
나는 그 정도의 자신감으로 무장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 주제와 분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게 계약직에 지원한 첫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일단은 편입생이어서 학벌에 자신이 없었다.
자신감을 가질 정도의 대학에 편입한 것도 아니었고, 편입하고 나서도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편입한 대학에서 같은 학우들을 따라가기도 벅찼는데, 내가 감히 수도권 대기업을 뚫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학벌을 안 보는 일명 “블라인드” 채용을 하는 공공 쪽으로 가는 게 맞겠다는 판단을 했을 뿐이다.
때마침, 내가 전공한 환경공학과라는 전공은 공공 쪽으로 일정 수요가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쪽 분야에서 먼저 일을 하며 실무 역량을 쌓고 경력을 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참 괜찮은 판단이었다.
요즘처럼 경력이 중요한 시대에는 더더욱.
다만, 내가 겪은 현실이 생각보다 녹록지 않았을 뿐.
두 번째 이유는, 나는 빠르게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환경공학과라는 전공에 큰 흥미를 못 느꼈고, 그저 빠르게 ”대학“ 밖의 세계에 뛰어들고 싶었다.
딱히 넉넉한 대학생활을 하지 못했어서 그런지, 세후 190 정도의 월급이라 하더라도 나에겐 감지덕지 일 거 같았다.
왜 배우는지 모르겠는 이상한 수식과 지식들보다는, 실무에 가까운 지식을 배우고 싶었던 욕망.
편입 후에 코로나가 터져서, 사람들과 거의 어울리지도 못했던 아쉬움도 있었다.
이런 아쉬움과 욕망이 뒤섞인 나는 무작정 지방에서 인천으로 상경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인천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된 나에게, 사회는 생각보다는 친절했지만 따뜻하진 않았다.
2022년 2월 28일.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나는 긴장, 불안, 두려움이 컸지만 그와 비례하게 설렘, 열정, 용기를 가지고 출근하였다.
면접 대기실에서 봤던 동기들을 볼 생각에 약간의 기대감도 있었다.
출근 시간은 9시였지만, 첫날은 당연히 20~30분 정도 일찍 출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여 8시 40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동기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미 대부분 자리에 앉아서 멀뚱히 앉아있었다.
정장을 입고 긴장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동기들이 대부분이었고, 세 사람정도는 꽤나 여유롭고 지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유로웠던 동기들은 이미 여러 곳에서 인턴이나 계약직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서로가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마주치면 다시 얼른 다시 눈을 되돌렸던 풋풋한 사회초년생들.
무심하게 핸드폰을 하는 척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말을 꺼내면 귀를 쫑긋거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9시가 다 되어가자, 채용 관련 담당자 대리님이 오셔서 근로계약서와 다른 서류들을 건네주었다.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차례대로 인사를 나누었다.
차장님과 대리님, 다른 계약직 사람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자리에 배치되었다.
10명이 넘는 계약직들을 위한 컴퓨터는 없었고, 노트북과 모니터를 하나씩 지급받은 후 보안 및 각종 관련 프로그램을 설치하다 보니 금세 오전이 지나가버렸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우리들을 챙기기 위해, 기존의 계약직 선배들이 두 조로 우리들을 나누어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동기들은 전부 제안에 응했으나, 나는 몸도 안 좋았고 낯가림을 했었어서 자취방에서 따로 먹겠다고 하며 거절했다.
그때는 몰랐다. 첫날의 점심이야말로 어찌 보면 첫날의 업무 중에 가장 중요한 업무 중 하나라는 것을.
하지만, 그 업무를 포기한 대가는 달콤했다.
자취방에 누워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오전의 긴장감과 불안감을 해소한 나는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첫날의 오후는 금방 흘러갔다.
당연히 일은 시키지 않았고, 부서에서 수행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여러 직원들의 교육만 듣다 보니 퇴근시간이 금방 다가왔다.
딱히 한 거는 없었지만 오후에도 내내 긴장을 하며 교육을 들었더니, 몸과 마음은 이미 녹초가 되었다.
6시가 되자, 근로계약서를 나눠주었던 대리님이 퇴근하라고 말을 했고, 10명이 넘는 동기들이 일제히 일어나 퇴근했다. 나는 그 선두주자로 누구보다 빨리 건물을 빠져나왔다.
봄을 앞둔 2월 28일.
어슴푸른 노을과 차가운 바람이 나의 퇴근길을 마중 나왔다.
캔맥주 하나를 사서 돌아가는 달콤했던 저녁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날의 저녁에는 몰랐지..
소주처럼 씁쓸한 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우리 부서는 크게 3가지의 팀으로 나뉘어 있었다.
1. 계약을 관리하는 팀
2. 서류를 평가하여 업체 등급을 매기는 팀
3. 사이트의 시스템을 관리하는 팀
나는 세 번째인 시스템 부서를 배정받아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다른 동기 셋과, 새로 배치받은 정규직 주임 한 분, 계약직 선배 한 분 및 파견을 나온 용역회사의 프로그래머분까지 합쳐서 6명이서 시스템을 책임지게 되었다.
부서의 이름만 보면 코딩과 전산업무를 하는 IT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프로그래머 한 분을 제외하면 나머진 환경공학/화학공학 출신이다.
우리 부서는 말 그대로 사이트의 시스템을 관리하고 개선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테스트를 하고 민원을 받아야 하는 부서였다.
이 사이트는 민간의 소기업 업체분들이 계약을 맺을 때, 불공정계약을 맺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계약서를 검토해 주는 게시판이 있었고,
그 외에 업체의 편의성을 위해 각종 대장과 서류들을 관리할 수 있는 여러 메뉴들이 있었다.
솔직히,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엉망진창인 사이트였는데 법적으론 6개월 뒤에 “의무 사용”을 시작해야 했다.
프로그래머를 제외한 우리 5명의 사람들은 사이트의 오류를 해결하고, 이용자 편의성 향상 및 추가로 필요한 기능들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테스트를 하고 민원을 응대하는 역할이었다.
지금에서야 그때가 정말 엉망진창이었고 꿈도 희망도 없었음을 알고 있으나, 그 당시의 나는 솔직히 많이 설렜었다.
처음 사업설명을 듣고, 우리 시스템 부서가 해내야 하는 일들을 들었을 때는 사명감 같은 헛된 감정까지 품었다.
‘내가 꼭 이 사이트를 개선시켜서 모두를 만족시키리라!‘
이상한 자신감으로 가득 찬 나는, 남들 퇴근해서 스펙 쌓거나 다른 필기 공부를 할 때 열심히 사업공부를 하고 아이디어까지 만들었다.
부족한 엑셀 실력으로 예쁘게 정리도 했었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던가? 사회초년생의 무식함과 특유의 의욕과 열정이 합쳐진 나는 용감했고, 좀 많이 나댔다. 활활 타오르는 열정 속에서, 이게 일하는 맛이구나!라는 걸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정말 몰랐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그만큼의 장작을 더 필요로 하고, 더 빨리 꺼진다는 것을.
나는 내 불길이 가장 먼저 꺼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나는 입사 5개월 만에 동기들 중 가장 먼저 자진퇴사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