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생을 향하여..
두 번째 체험형 인턴을 하면서 맡은 업무는 너무 의미가 모호했다.
이 업무를 하는 목적과 방향성을 알려주시긴 했으나, 내 입장에선 동기부여를 얻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사업에 큰 관심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사무직 자체가 안 맞아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더 이상 업무가 재미없고, 사무직의 삶도 싫었고, 전화를 받는 것도 싫었던 나는 빠르게 시험인증기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여러 기관들과 중소기업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가장 네임드가 있는 기관을 가고 싶었다.
연봉은 두말할 것도 없고.
업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관은 찾는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기관은 명성에 걸맞게, 계약직임에도 나름 준수한 연봉을 주고 있었다.
웬만한 환경분야 공공기관 정규직의 초봉급 연봉을 주고 있었으며, 계약직은 수시로 채용하고 있어서 공고가 자주 올라왔다.
이력서나 자기소개서가 딱히 어렵지는 않았는데, 공공기관과 달랐던 점은 성별, 나이, 학력 및 사진까지 전부 기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확실히 공공기관과는 다른 점이 많구나를 서류 제출단계에서부터 느꼈던 것 같다.
첫 번째는 너무 무성의하게 서류를 작성했는지, 탈락을 했다.
좀 충격이었지만, 이쪽이 경력자들도 많고 지원자들도 많다고 알게 모르게 들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딱히 상심하지 않고 나는 곧바로 두 번째 채용공고에 지원했다.
제출 후 일주일 정도가 지나니, 서류합격 연락이 문자와 메일로 왔다.
면접은 4~5일 뒤로 잡혔는데, 나는 지원한 분야 관련 지식만 약간 공부하기로 했다.
인성은 여러 번의 면접준비를 통해 딱히 준비할 게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임기응변으로 잘 무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면접날은 항상 금방 다가왔고, 나는 처음 지원하는 분야다 보니 약간 긴장한 마음으로 면접장을 향했다.
면접은 생각보다 심플했다.
계약직은 정말 일주일에 1~2개의 채용공고가 계속 올라올 정도로 수시로 뽑다 보니, 절차가 정말 간소화된 듯했다. 회사 건물 내에 카페테리아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장을 입은 내 또래 남자 1명, 여자 2명이 앉아있었다. 오늘 면접을 보는 곳은 우리 팀 밖에 없었기에, 딱 봐도 나 포함 4명이 오늘 면접을 보고 그중에 1명이 뽑히겠구나 싶었다.
면접 시간이 다가오자, 면접 안내관이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부서의 3인자 급이었던 책임연구원님이셨지만, 그때는 그냥 인사/행정 쪽 직원분인 줄 알았다.
나는 남자 1명과 같이 면접장에 들어서서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면접은 참 평이했다.
질문 자체가 어렵지 않았는데, 나는 이상하게 나이 관련으로 계속 압박 면접을 받았다.
나이가 꽤 많은 편인데 조직에서 적응이 가능하냐, 사수가 나보다 나이가 적어도 괜찮냐는 등의 질문을 계속 받았다.
여기는 사기업이다 보니, 29살의 나이는 이제 좀 많은 나이인가 싶었다.
하지만, 나중 가서야 알았는데 내가 이력서에 나이를 무려 6살이나 뻥튀기를 해버려서 그런 것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면 충분히 압박 면접을 받을 만한 나이였다.
그렇지만, 그 당시 면접장에선 나의 실수를 몰랐기에 나는 주눅이 들었다.
설상가상, 내 옆에 남자 지원자는 나보다 3살은 어린 남자였고 경력도 있다 보니 계속해서 좋은 질문과 답변을 받고 있었다.
'아.. 이거 끝장이구나.'
나는 면접장에서 내가 떨어짐을 직감했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대부분은 인성질문이었기에, 내가 준비해 온 지식들을 뽐낼 수 없었고 차별화된 점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내 옆의 남자가 뽑히거나, 다른 여자 지원자 2명 중 1명이 뽑히겠구나를 느꼈다.
첫 번째에서는 서류에서 탈락했고, 두 번째에서는 면접에서 탈락한다면 세 번째에는 면접도 통과하지 않겠는가? 일주일에 채용공고 1개 정도는 무조건 올라왔기에, 나는 다음 주에 또 서류를 제출해서 면접을 보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 잡았다.
내 전공과도 좀 다른 분야의 시험이었기에, 다음에는 더 좋은 기회가 생길 거라고 위안하며 인턴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나는 3일 뒤에 갑자기 합격 통보를 받게 되었다.
정말 예상치 못한 합격이었기에, 나는 기쁜 마음보다 오히려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대체 왜 뽑힌 거지? 나는 나이도 잘못 기재했는 데다가 이쪽 관련 경력이 아예 없었는데?
그냥 사기업이다 보니, 인상이나 분위기로 본 것인가? 아니면, 그 남자분이 딱히 평판이 안 좋았을 수도 있겠다. 이래서 면접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구나?'
나는 별의 별 생각을 하며 내 합격의 원인을 추측하려 했다.
하지만, 합격자는 어차피 면접관이 정하는 거고 내가 왜 뽑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장 급한 거는 출근 준비였다.
합격 안내 연락을 월요일 저녁에 받았는데, 담당자가 당장 내일 모레인 수요일에 출근할 수 있냐고 해서 나는 급하게 준비해야 했다.
인턴 퇴사절차가 최소 2일은 걸렸기에, 나는 수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에 출근할 수 있다고 다시 채용담당자께 연락을 드렸고, 그렇게 나는 합격연락을 받자마자 이틀 만에 퇴사하게 되었다.
너무 급작스러운 퇴사라 그저 간단하게 인사를 드리고, 급하게 짐을 챙겨 나와야 했지만 다들 따뜻하게 말씀해 주셨다. 같은 부서 동기들에게 간단한 선물도 주고 나서(내가 제일 연장자라서 그냥 주는 게 맞는 거 같았다) 나는 퇴사했고, 정신없이 시험인증기관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첫날의 출근은 항상 떨렸다.
새로운 조직으로의 출근은 5번은 경험한 거 같은데, 왜 떨림은 멈추지 않을까?
이 떨림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50대가 되어도 분명 떨리겠지?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8시 40분쯤에 사무실로 출근했다.
여러 팀과 함께 쓰는 사무실은 생각보다 트여있었고, 넓었다.
가장 먼저 팀장님이 눈에 들어왔는데, 면접에서 가장 중앙에 앉아서 날카로운 질문을 했던 면접관이 우리 팀장님이었다.
깍듯하게 인사를 드리고 나니, 내가 앉을자리를 안내받았는데 책상이 생각보다 넓어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자리에 앉아서 짐을 정리하고 쭈뼛쭈뼛 자리에 앉아있었더니 부서 사람들이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9시가 넘어가자, 책임연구원님이 자리에 오셔서 여기저기 시험실 투어와 함께 실험복도 지급해 주었다.
시험복을 입고 나니, 비로소 진짜 시험연구원이 된 기분이 들었다.
사무직만 하다가, 시험연구원이 된 기분은 처음에 정말 좋았다.
시험복도 깔끔했고, 시험실이라는 장소도 너무 신선했다.
교육일정도 3주나 되었기에 3주 동안은 정말 편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시험연구원의 삶은 절대로 만만한 삶이 아니었다.
교육이 끝나자, 본격적인 시험업무가 시작되었다.
업계 최고의 기관인 만큼, 내가 시험해야 할 시료들이 정말 많이 들어왔고 그만큼 업무량이 늘어났다.
사무직은 본인의 능력에 따라, 또 기한에 따라 업무를 어느 정도 임의적으로 조절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의뢰한 날짜에 맞춰서 무조건 실험이 거의 끝나야 했기에 항상 기한이 정해져 있었고 내가 해야 할 업무는 더 빠르게 처리할 수도 없었다. 실험은 정해진 방법에 따라 진행해야 했고, 실험은 속도를 빠르게 할 수 있는 실험이 아니었다.
최소한으로 필요하는 물리적인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그 시간을 잘 활용해서 시험을 잘 마쳐야 하는 게 처음에 좀 어려웠다. 하지만, 시험연구원은 결국 매일 반복적인 실험을 하면서 정해진 업무를 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처음에 실험을 배울 때는 분명 어려웠지만, 익숙해지고 나니 쳇바퀴 돌 듯 반복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러한 삶이 내 적성에 잘 맞았다.
시료가 많이 들어오거나, 여러 상황으로 바빠서 야근도 정말 많이 했지만 그래도 똑같은 업무를 매일매일 하는 시험연구원의 삶이 나쁘지 않아서 버틸 수 있었다.
오늘 한 업무와 내일 한 업무가 거의 95% 이상은 일치하는 삶.
그래서, 내일이 예상되는 삶은 정말 나쁘지 않았다.
또, 그저 시간을 때려박으면(?) 업무가 해결될 수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사무직의 경우, 새로운 제안서나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거나 자료조사를 해야 할 때면 막막하고 시간을 많이 들여도 부족하고 지적받을 만한 사항이 많은데, 시험은 그런 게 없었다.
시료량이 많아서 야근을 하게 된다면, 그냥 시간을 들여서 시험을 한 번 더 하면 끝이었다.
2시간 정도만 야근하면 일이 다 끝나겠구나 예상할 수 있고 머리를 딱히 쓰는 업무도 아니었기에 나에게 딱이었다.
게다가, 같이 일하는 직원분들이 하나 같이 전부 너무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컨설팅사에 다닐 때, 나 혼자 내던져서 업무를 하는 게 얼마나 고역이었던가?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부터 열 까지 자세히 가르쳐주었고, 똑같은 걸 또 물어봐도 짜증을 내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상세히 알려주는 모습들이 너무나 좋았다.
아직 막내이고, 남자라서 그런지 여러 잡무(시험실은 무거운 걸 들고 날라야 하는 업무가 간혹 있어서 이건 남자밖에 할 수 없긴 하다)를 하다 보니 업무가 조금 많은 편이긴 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사무직과 현장직을 살짝 섞은 듯한 느낌이라 머리를 하루종일 쓰는 것도 아니었다.
시험연구원도 윗직급으로 올라가면 실험보다 사무업무를 훨씬 더 많이 하긴 하지만, 그건 너무 먼 미래였다.
당장 지금은 실험을 제일 많이 하고, 사무 업무라 해봤자 진짜 사무직들의 보고서 작성에 비하면 사무업무라 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나는 공공기관 사무직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업무를 하게 되었고 이 점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었다.
연봉은 어떤가? 현재 계약직임에도 웬만한 환경분야 공공기관 정규직의 초봉정도를 받고 있다.
내가 만약 정규직이 된다면, 공공기관이 아니라 사기업 중견기업이나 대기업과 연봉을 비교해야 할 정도로 공공기관보다는 연봉을 확실히 더 받는다.
대기업보다는 항상 부족한 연봉이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
수도권에서 근무를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방 발령이나, 전국 순환을 걱정할 필요 없이 말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업무 자체가 워낙 개인적인 실험업무다 보니 같은 부서 내 사람 말고 다른 부서 사람과는 소통하기가 힘든 것이 흠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타 부서 사람들과도 천천히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더 이상의 방황은 그만두자.
그 간의 2년 반 동안의 방황은 나의 적성과 진로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생각하자.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미생의 삶이지만, 적어도 내가 걸어갈 길은 드디어 찾지 않았는가?
이 길도 분명 순탄치 않음이 분명하고, 중도에 이탈할 수 있겠지만 일단은 걸어볼 마음이 생긴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2년 반동안 걸은 길은 그저 목적 없이 방황한 길이었고 다시 되돌아가기도 한 길이었다면, 적어도 이 길은 앞으로 쭉 뻗은 길이니깐.
공공기관 취업은 막연히 대학생활을 하면서 생긴 꿈이 아니었던가?
그저 워라밸과 안정성, 블라인드 채용 때문에 골랐던 게 나의 진로였다면 당연히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살아가고 있으니, 언제든 수정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나의 공공기관 취업은 결과적으로 보면 실패 기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다르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중에 내 진로를 찾고 내 업무에 그럭저럭 만족하면서 지낸다면, 27~ 29살의 나는 그저 취업실패자가 아니라 취업방황자로 불릴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실패한 과거는, 내 찬란한 미래가 덮어 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좀 더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나의 취업 실패기가 훗날에는 내 인생 성공기가 될 수 있도록.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지 않던가?
꺾이지 않았던 나에게 딱 한마디만 해주고 싶다.
고생했다.
앞으로 어떤 길이 또 나타나고, 지금 걷고 있는 시험연구원의 길에서 또 중도이탈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계속 걸어갈 나 자신을 응원하고 싶다.
분명 그 당시에는 힘들고 어려웠던 여정이었지만, 지나고 보면 추억이 되었고 아름다운 순간도 분명 있었으니
지금의 이 길도 너무 무작정 땅만 보며 걷지 말고 주변의 풍경을 보며 걸어가 보자.
그러다 문득, 뒤돌아봤을 때 내가 걸어온 길에는 분명 꽃이 피어있겠지.
그 꽃은 분명, 눈물겨우면서도 찬란할 것이다.
내가 힘겹게 피어낸, 나만을 위해 피어난 꽃일테니 말이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