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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도서관에서 시작한 1학기

남들 다 놀 때 공부를 한 청개구리

by Nos

대한민국에서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는 시절은 언제일까?

단언컨대, 20대 초반의 대학시절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중,고등학생들은 수능이 끝난 후의 자유로움을, 직장인들은 일에 치이지 않는 여유로움을 부러워 하는 시기.

아무리 과제, 중간/기말, 취업 때문에 힘들다 곡소리를 낸다 하더라도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인건 부정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정작 그 시절의 나는 그 소중함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편입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만 머리속에 가득찬 사람이었다.

고개를 들면 하늘은 밝게 빛나고 있는데, 나는 어두컴컴한 땅만 바라봤던 시절이었다.


사실, 편입은 2학년까지 교육과정을 다 끝내고 나야 응시자격이 주어지기에 1학년부터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었다. 목표로 하는 대학은 학점도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고 토익과 전공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에서 토익 공부만 좀 해와서 토익점수를 미리 만들어놓고 전공 공부만 학과공부와 병행하면서 하면 충분했다.

하지만, 20살의 나는 그런 정보들을 하나도 알지 못했다.

1학년부터 성급하게 미리 공부를 해야 하는줄 알았기에, 남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도.


아직 군대도 안 갔다왔던 나는 뭐가 그리 성급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1학년 부터 학과생활에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

소위 말하는 '아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2015년의 대학가는 2025년을 앞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요즘은 워낙 경기가 어렵고, 취업이 힘들다보니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취업준비니 자격증이니 그런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2015년은 아니었다.

그때도 취업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1학년들은 청춘과 자유를 즐길 시기였다.

내가 다녔던 대학은 특히나 더 그랬다.

냉정하게 말하면, 수능 5등급을 받은 학생들이 갔던 대학이었는데 학창시절에 공부를 했으면 얼마나 했겠는가? 그랬던 학생들이 대학 1학년이 되니 공부 하는 척도 안했다.

오티때 친해졌던 무리애들은 벌써부터 삼삼오오 모여다니며 술을 먹고 게임을 하고 다녔다.


나는 그런 마음의 여유는 없었기에, 일부러 애들과 멀리하면서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우선은 학점부터 높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강의를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때보다 더 열심히 말이다.


하지만, 굳게 다짐한 내 마음과 달리 1학기 수업은 너무 널널한 편이었다.

특히, 교양필수 과목이었던 대학영어는 너무나도 쉬운편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be동사를 30분이나 배울 정도였다!

빠르면 초등학교, 아무리 늦어도 중학교때 배우는 그 기초 문법을 대학생되서 배우니, 솔직히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I am, You are, We are..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학생들이라면 솔직히 기초중의 기초이지 않는가?

이걸 배우고 있자니, 집중이 되지 않아서 나는 교재에 있는 퀴즈들을 미리 풀어놓고 책을 싹 훑어봤다.

다 훑어본 결과, 이 수업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은 이미 내가 한 번 복습만 하면 싹 다 아는 내용이었다.


자괴감이 몰려왔다.

아무리 교양영어라지만.. 이걸 배우려고 대학을 왔는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몇몇동기들도 충격을 먹은 듯 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고, 내 직감이 맞았다.

그들은 2주만에 대학에서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반수나 재수를 하러 떠난것이겠지.


하지만 더 충격적인 것이 있었다.

바로, 그 be동사마저 틀리는 내 동기들이 있다는 것이다.

be동사 문제들을 후다닥 풀고, 다른 동기들이 끙끙거리고 있길래 슬쩍 교재를 훔쳐봤는데 You am, We is 등의 답을 봤을 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외부에서 봤을 땐, 나도 뭐 동기들과 비슷한 학업실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일 거라 생각이 드니 부끄러웠다.


지금에서야 그때의 학업수준으로 더 이상 사람을 판단하거나 무시하려는 마음은 사라졌지만, 20살의 나는 그랬다. 학벌이 전부로 보였던 시절이었으니.

동기들의 실력을 보고나자, 나는 더욱 더 그들과 갈라선 채 혼자서 다니고 싶어졌다.

그래서, 가장 맨 앞자리에 혼자 앉아서 교수님 강의를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강의를 듣고 나면 바로 도서관에 가서 복습을 하고, 도서관 열람실을 제외한 대출반납실이 문닫는 6시까지는 어떻게든 책상에 앉아있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마음에 안들고, 주변을 살펴볼 생각도 없이 그저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잡혔던 20살의 나.

그 때, 대학을 다니면서 딱 하나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바로 이 도서관이었다.

동네의 도서관과 다르게, 규모부터가 남달랐던 대학의 도서관.

나는 처음 방문하자마자 이곳에 내 마음을 빼앗겼다.

지하 1층부터 8층까지, 총 9층의 규모였던 도서관은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가득찼고 공부할 수 있는 열람실도 널찍했다.


오래된 책들을 모아놨던 1층 대출반납실은 동네 도서관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책냄새가 물씬 풍겨오면서도, 오래된 나무 책장들과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책들.

그 중간중간 마다 조그맣게 마련된 좌석들과 거기서 비춰오던 햇살들.

마음에 드는 책 한권을 끄집어 내어 햇살 속에 있노라면, 내 죄책감과 불안감은 별일 아닌 듯 녹아내리곤 했다.


2층은 공부할 수 있는 자습실, 즉 열람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아는 칸막이들로 가득찬 독서실 느낌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이곳은 너무 숨막히는 기분이라 나는 잘 가지 않았다.

내가 주로 공부하러 갔던 곳은 4층의 신간도서실과 6층의 열람실이었다.

4층의 신간도서실은 말 그대로 출판된지 5년 이내의 신간서적들이 즐비했던 공간들로, 새 책만큼이나 공간도 깔끔하고 신식이었다.

책상들도 8인 테이블이 널찍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구석마다 2인테이블이 자리에 잡혀 있었다.

만화책이 꽂혀있는 공간에는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비치되어 있어서 잠깐 휴식할 때 앉고는 했다.


6층은 칸막이 좌석실이 아니라, 6인~8인이 앉을 수 있는 책상들이 수십개씩 배치되어 있었다.

시험기간이 아니면 몇몇 고시생들만 있었기에, 나는 넓은 책상을 혼자 쓰면서 공부했다.


나는 도서관의 이 모든 공간들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마음 둘 곳 없던 내 마음은 캠퍼스를 방황하다가, 도서관에 와서야 정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허구한 날 도서관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강의 사이 빈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는 항상 도서관에 들렀고, 가끔은 주말에도 방문할 정도였다.


남들 다 놀러다니고 술을 마실 때, 나는 도서관에서 복습을 하고 과제를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내고 나니, 금세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중간고사 기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한산함이 없어지고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그것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대학의 첫 중간고사는 어떻게 나오는지 몰랐고, 긴장하면서 공부를 준비했다.

밤까지 새면서 열심히 하지는 않았고, 적당히 9시까지 공부하면서 시험을 쳤다.


대학의 시험을 치면서 신기했던 것은, 다 같이 끝나는게 아니라 시험이 끝나면 먼저 나갈 수 있었다는 것.

내 동기들은 시험 시작한지 10분도 안 되서 나가려는 애들이 많아서, 교수님이 20분 ~ 30분은 앉아있으라고 했다. 나는 동기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들 그냥 백지로 작성하고 나가려고 하는 걸 알고 있었다.


대부분 주관식 시험이었지만, 나는 평소에 공부를 워낙 많이 했었기에 막힘없이 쓸 수 있었다.

원래 못하던 수학말고는 시험을 다 잘 본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동기들 중 몇명은 나름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거 같았기에 자만할 수는 없었다.


일주일간의 시험이 끝나자, 대학은 시끌벅적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학 앞쪽의 술집거리들이 시끌벅적해졌다고 하는게 맞을 것이다.

다들 삼삼오오 술을 마시러 가고, 수업도 빼먹었지만 나는 달라진게 없었다.

다만, 나만의 조용한 자축을 위해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지 않고 만화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책을 읽었을 뿐.


중간고사가 끝난 다다음주.

성적이 하나 둘 씩 공개되기 시작했다.

나는 수학을 제외하고는, 전과목에서 거의 1~5등이었고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한 과목도 있었다.

어떤 교수님은 직접적으로 내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다.


나는 중간고사 이후로 잠깐의 유명세(?)를 얻었지만, 딱히 즐겁지는 않았다.

그저, 과제를 어떻게 해야하고 공부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보는 동기들이 생겨서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인사하는 동기들이 많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동기들과 어울리지 않고 도서관을 조용히 다닐 뿐이었다.


이렇게, 내 대학 1학년의 1학기는 학교의 도서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나는 편입에 필요한 공부습관을 잡을 수 있었지만, 동기들과 친하게 지낼 시간은 당연히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동기들과 어울리지 않고 도서관만 다닌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살았을 테니까.

하지만, 동기들과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더라도 동아리에 가입해서 다른 과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볼껄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어쨌든, 중간고사가 끝난 뒤의 강의도 나름 널널했고 과제도 별 거 없었다.

중간고사 시험과목의 난이도를 알았기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었던 걸 알게 된 나는 도서관에서 놀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논다는 말이 참 웃기지만, 책이랑 만화책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읽기'라는 행위 자체가 노는 것과 다름없었다. 동기들과 게임하는 것보다는 책 읽는게 훨씬 재밌었다.

애초에, 내 죄책감의 원인 중 하나가 게임이었기 때문에 하고 싶지도 않았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한 달동안, 나는 도서관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여유로움을 맘껏 느꼈다.

참 행복하고도 즐거운 시간은 역시나 금방 흘러가버리고,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기말고사도 중간고사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

중간고사보단 덜했지만, 열심히 공부했던 나에게 기말고사도 쉽게 느껴졌다.


시험이 하나 둘 씩 끝나면서,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캠퍼스내 학생들의 수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캠퍼스의 사람들이 거의 줄어든 6월 말.

드디어, 나의 1학기 성적이 공개되었다.


나는 이 1학기의 성적 덕분에, 2학기의 생활이 약간 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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