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맨발 코스
호텔 침대에서 잠을 푹 잤다. 11시간 동안 삼십여 킬로를 걸었기 때문에 몸이 피곤했을
것이다. 해변의 울퉁불퉁한 돌 위를 걸어서 오장육부가 자극을 받아 깊은 잠의 세계로
빠진 것이다.
어젯밤 호텔 흰 침대 시트에서 잠을 잔 호사를 누렸다. 아침 7시 호텔방에서 창문을 열어보니 한라산과 바다가 보인다. 오늘도 날씨는 최고로 좋다.
느긋하게 준비하고 아침 아홉 시에 5코스를 출발했다.
오늘부터는 하루에 한 코스만 돈다.
5코스 나오자마자 갈래 길이 나온다. 갈래 길이 나오면 항상 멈춰서 올레길 리본 표시를 확인하고 가야 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그냥 가면 낭패를 본다.
갈래 길이 없는 외딴 길에는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다. 방향 표지도 띄엄띄엄 있어 이런 길에서 표지가 안 보인다고 머뭇거리고 당황해서는 안 된다.
인생의 여정도 그런 듯하다. 갈림길이 항상 나타난다. 그럴 때 천천히 자세히 관찰하면 그곳으로 오라는 표시가 보인다.
남원에서 출발해서 해안가를 지난다. 어촌 부부가 해안가에서 오징어 건조 작업을 한다. 자세히 보니 오징어를 두 손으로 납작하게 펴는 작업이다.
우리가 즐겨 먹는 마른오징어가 햇빛에 저절로 마른 것이 아니고 누군가 자주 오징어를 펴야 하는 노동이 필요하나 보다. 구운 오징어 두 마리를 이만 원에 판다.
파도소리는 듣기 좋은 저주파다. 귀를 통과한 소리가 몸속 깊이 스며들며, 심장과 창자가 공명하여 전신의 울림을 만든다. 이는 인간의 몸의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고, 물 분자들이 서로 호응하는 것이 아닐까?
고주파로 재잘거리는 새소리와 대조를 이룬다. 새 한 마리가 낮게 활공하며 바닷가 바위에 앉는다.
새는 날개를 넓게 펼친 상태에서 화려한 포즈를 취하며 활공하다가 바위 바로 앞에서 브레이크를 잡듯 날개를 펼치며 내려앉는다.
새소리는 귀에서 들어와 머리 꼭대기 위로 돈다.
하늘에서 들리는 소리는 높고, 깊은 바다에서 몰려온 소리는 넓고 깊다.
파도 소리는 다양하다.
폭풍이 치는 소리, 대나무 숲을 지나가는 후드득 바람소리, 농부가 단숨에 목구멍으로 물 넘기는 소리, 우우우 함성을 지르다 배고파 배 속이 꼬르륵 거리는 소리. 누군가는 통곡의 소리로 듣고 누군가는 기쁨의 함성소리로 듣는다.
큰엉은 도로와 떨어져 해안을 따라가는 식물의 동굴 같은 산책로이다. 식물이 아치를 이루며 동굴처럼 시원한 그늘을 만든다. 차 소리가 없는 그곳에서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소리와 새소리, 낮게 대화하는 부부의 말소리가 섞여 들린다.
공간이 한반도 지도 형태
난 다시 맨발이다.
큰엉 바닥은 제주도 관광단지에서 대리석처럼 다듬은 현무암이다. 매끈한 현무암을 밟을 때 발바닥의 감촉은 매끈하고 부드럽다.
응달에서는 시원함을 양지에서는 따스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바로 앞에 젊은 부부가 손을 잡고 걷는다. 남편은 배낭을 지고 아내는 짐 없이 남편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다. 나는 항상 혼자다. 지금까지는 외적으로 혼자였고 이번에는 내적으로 혼자이다.
정신적 홀로서기다.
대나무와 해송인 곰솔과 열대 식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녹색 빛을 내뿜는다. 해안 바위 돌과 바위 위도 걷는다.
5코스는 맨발에 최적의 코스다.
돌들은 큰 돌, 작은 돌 바위 상관없이 뾰쪽하지 않고 잘 다듬어진 곡선이다. 현무암은 구멍이 송송하여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홍갈색의 현무암을 봤다.
커다란 동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도로 옆에 줄지어 있다.
올레 길을 돌다 보면 동백꽃을 밟으며 걷는 호사를 종종 누린다.
막 떨어진 동백꽃을 주어서 자세히 보니 한 떡잎 꽃이다. 하나에서 갈라져 나와 일곱 개의 꽃잎이 나선형으로 꽃술을 감싼다. 가운데 대는 하얗고 머리가 노란 수술이 붓처럼 빽빽이 들어있다.
동백꽃 군락지가 있는 마을은 자연으로 가득 차서 낭만적 분위기가 있다.
잘 우거진 열대림,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 유자처럼 노란 과일이 열려 있는 나무가 있고 텃밭이 있는 아담한 집들이 있다.
나도 텃밭을 갖고 싶지 않을까? 고등학교 시절 주말에 시골집 내려가 농사일을 했지만, 비자발적, 수동적 노동의 수준이었다. 작물과 나무를 골라 가꾸고 싶다는 생각은 있다.
평생 농사지을 땅 한 평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아버지 한이 내 무의식 속에 있는지 모르겠다. 어딘가 모르지만 내 땅을 갖고 그곳을 가꾸며 살 곳이 있을 것이다.
어제 4코스 긴 해안가를 걸을 때 눈에 가장 많이 띄는 것은 양식장이었다.
5코스 해안가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보이는 몇 사람이 작업 실습을 하고 있다. 중년의 여자가 초보 남자를 상대로 작은 삽을 손에 쥐고 먹이대신 모래를 실습 삼아 효율적으로 뿌리는 방법을 교육시키는 중이다.
양식장에는 시커먼 플라스틱 천으로 지붕과 문을 꼭꼭 싸매고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지만 많은 물고기가 양식되고 있다.
5코스는 상대적으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사진을 많이 찍었다는 것은 그만큼 풍광이 아름답고 변화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손을 꼭 잡고 가는 백발의 서양인 남자와 한국인 부부, 다섯 명이 함께 다니는 중년의 여인을 지나쳤다.
무인 판매대에서 다섯 개에 이천 원하는 한라봉도 샀고 허름한 맛 집에 들어가서 점심으로 해물칼국수도 먹었다. 지금 3시, 5코스를 완주했다. 아침 9시 시작했고 점심 및 휴식시간을 빼면 4시간 반 정도 걸었다.
쇠소깍을 지나면 아스팔트길에 차가 많이 다닌다. 관광지에 대한 안내판이 도로변 곳곳에 있다. 제주의 장소 이름은 생소한 제주말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모른다.
양식장에 들어가 봤다. 검게 둘러쳐진 양식 장 입구가 열려 있는 곳을 발견했고 그곳에 있는 청년에게 한번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들어가라고 한다.
시멘트로 칸막이된 공간에 맑은 물이 있고 그곳에 많은 어린 광어들이 분주하게 헤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