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으로 간다 — 개성에서 한양까지, 국가 대이동의 기록
가을바람이 서늘해지던 날, 개성 남문 장터에 소문이 퍼졌다.
“임금이 드디어 서울(한양)로 도읍을 옮긴대.”
장터 상인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집도 가게도, 거래처도, 조상의 묘도 이 근방인데, 하루아침에 삶의 중심을 바꾸라니—쉽지 않은 일이다.
왕조가 바뀌면 천도한다는 말은 예부터 떠돌았고, 태조도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려 한양을 주목해 왔다.
한양은 강과 바다를 끼고 물류가 좋고, 나라의 한복판이라 다스리기 편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지금 당장” 옮기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궁궐 안팎도 시끄러웠다. 도읍을 정하는 일은 풍수와 국방, 행정, 민심이 한데 엉키는 큰 정치였다.
신료들 중에는 한양의 특정 터(무악)를 들어 “비결에 맞다”는 쪽도 있었고, “터가 좁고 조건이 미흡하다”는 반론도 있었다.
다른 후보지—장단, 적성, 심지어 부소(부여)까지—를 검토하자는 신하도 있었다.
태조는 여러 길지를 직접 둘러보며 결심을 다졌고, 의견 충돌은 몇 차례나 되풀이됐다.
결론은 명확했다. “도평의사사에 명해, 도읍을 한양으로.” 곧바로 관리가 파견되어 궁실 공사가 착수됐다.
그러나 천도는 ‘명령 한 줄’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개성의 민심은 복잡했다. 오랜 도성답게 기반시설과 시장이 이미 촘촘했고, 연줄과 생계가 얽혀 있었다.
그래서일까, “낯선 신도시보다는 익숙한 개성에 남겠다”는 기류가 적지 않았다.
일부 대신과 공신들 역시 새 도읍에 미온적이었고, 대체지 주장을 되풀이하며 속도를 늦추려 했다.
새 왕조의 의지와 구왕조 수도의 관성 사이에서, 하루는 전진하고 하루는 뒤로 물러서는 공방이 이어졌다.
천도는 ‘이사’가 아니라 ‘국가 대이동’이었다.
관청은 각 관부의 이전 일정과 호적·전적 이관을 짰고, 공역(노동) 징발로 성곽·도로·종묘·사직 터를 닦았다.
성문을 세우고 길을 내고 기둥을 세우는 동안, 한양엔 마차와 인부가 끊이지 않았다.
관원 집단은 먼저 길을 텄고, 뒤이어 공신과 대가문이 행렬을 이었다.
가구마다 가마와 소달구지에 살림을 싣고, 종가의 사당과 문중의 분묘를 어찌할지 논란이 잦았다.
특히 궁궐과 도성을 세우기 위한 공사는 그야말로 전국적인 노역이었다.
태조 3년(1394) 천도 결정을 내린 직후, 경복궁·종묘·사직단·도성(한양성곽) 건설이 시작됐다.
개성뿐 아니라 경기·충청·강원·전라도 일부 지역에서 장정들이 징발됐고,
도편수라 불린 총책임자 아래 목수·석수·와공·단청장 등 장인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공사 인원은 수천에서 수만에 달했고, 일부 추정에 따르면 성곽 축조에는 20만 명 이상이 동원되기도 했다.
노역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실록엔 “백성들이 집을 떠나 장기간 공역에 시달려 농사가 소홀해졌다”는 보고가 나오고,
징발을 피하려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태조는 일부 세금 감면과 곡물 지원을 명하며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 결과 경복궁은 1년여 만인 1395년 정월에 첫 정전(근정전)을 낙성했고,
종묘와 사직단도 같은 해 여름 무렵 완공됐다. 한양성곽은 1396년에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관청 건물, 도로, 시장 등 기반시설 공사는 태종·세종 대까지 이어졌고,
완전한 도성 체계가 갖춰진 것은 천도 후 약 30년이 지난 세종 초였다.
이 시기 한양은 매일같이 변했고,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길목은 짐수레와 인부, 관원의 행렬로 붐볐다.
결국, 천도는 ‘왕의 결단’이자 ‘사회 전체의 대이주 프로젝트’였다.
개성 사람들의 보수적 본능과 새 질서에 대한 호기심, 대신들의 이해득실과 국왕의 장기 구상—
이 모든 것이 한양의 도시 설계도 위에서 맞부딪혔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한양은 정말로 “나라의 한복판에서 후대까지 이익을 가져다”주는 수도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개성에 살던 귀족과 관료들은 대부분 한양으로 이주했지만, 모든 것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양은 아직 ‘신도시’라 관료와 가족들이 거주할 만한 집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기존 개성의 저택과 비교하면 규모나 품격에서 부족했다.
당시 개성은 10만 호 약 50만 명의 대규모 국제도시였으나, 한양은 세종 때가 되어서야 인구 10만이 되었다.
그래서 많은 집안은 개성의 집과 세간살이를 그대로 둔 채, 최소한의 가구만 가져와 한양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태조 4년,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일부 대신들이 새 집터와 건물 자재를 놓고 다투거나, 개성에 있는 집을 팔지 않고 양쪽에 거처를 두는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왕이 “개성의 기득을 미련 없이 버리고 한양에 안착할 것”을 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의 한 장면을 대화체로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 개성의 한 대신 댁 사랑방 —
“대감, 한양 집은 언제쯤 마련하실 생각이십니까?”
“허허, 이보게. 한양이야 좋다지만, 집터도 좁고 물가도 비싸다네.
지금 있는 개성 집만 해도 대대로 내려온 고택인데, 그걸 어찌 하루아침에 버리겠는가.”
“하지만 전하께서도 속히 이주를 원하시니…”
“그래서 말인데, 나는 한양에 작은 집 하나만 마련하고 당분간 오가며 지낼 생각이네.
개성 집은 그대로 두고 말이지.”
이런 식으로 한동안 많은 관료들이 ‘양도시 생활’을 이어갔고, 한양의 집값과 자재값은 크게 올랐다.
기록에는 한양의 목재와 기와 공급이 모자라 궁궐 공사 일정이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도 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왕명과 정치적 압박, 그리고 한양 기반 행정체계의 강화로 귀족과 관료들은 완전히 한양에 정착하게 되었다.
21세기 대한민국도 세종 행정수도 이전으로 논란이 많았다. 조선초기 관료들이 개성에 본집을 두고, 한양에 임시 거쳐들 두고 기러기 생활을 했듯이, 세종시 공무원도 아직 많은 경우 서울에 본가를 두고 있다.
중앙 집권 국가였던 영국 프랑스등은 런던 파리 등 수도 기능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 수도 이전에 대한 논란이 없다.
오랫동안 분권 국가였던 독일은 통일전 서독의 수도가 본이었으나 통일 후 다시 베를린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수도 이전은 권력 기반의 이동이다. 권력 기반의 변화 없이 수도 이전은 쉽지 않아 보인다.
한양 천도는 그런 의미에서 고려 귀족 사회에서 조선 관료 사회로 권력 이동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