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D+2) 275km/ 누적 거리: 608km
미국의 더위는 대한민국과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내가 건너고 있는 모하비 사막의 기온은 섭씨 40도가 훌쩍 넘었다.
쪄 죽기 싫어서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원래는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천천히 일어나려고 했지만,
시원한 새벽부터 자전거를 타고 일찍 일정을 마무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페달을 밟자마자 무릎과 허벅지를 타고 심한 근육통이 올라왔다.
하지만 몸도 적응했는지, 잠깐 달리다 보니 고통은 이내 무뎌졌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풍경의 연속이었다,
길게 이어진 66번 국도에는 선인장과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 있었고, 중간중간 죽어있는 동물들도 보였다. 자전거에 오른 지 2시간이 지나도록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동안 못했던 생각 정리도 하고, 애창곡을 부르기도 했다. 처음 느껴보는 자유로움이었다. 자유를 만끽하며 신나게 내달렸다. 내리막에서는 시속 60km를 찍기도 했다.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기 위해 휴게소에 들렀다. 달걀 부리또와 이온 음료를 결제하는데, 주인아주머니가 행운을 빈다면서 웃어주셨다. 옆에 있던 직원도 본인이 케이팝을 좋아한다면서 응원을 해주었다.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은 대화였겠지만, 고독한 싸움을 하다 보니 이런 작은 친절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역시 미국은 다정하다.
힘을 얻어 다시 길을 나섰다.
오전 10시가 되니 기온은 36도에 육박했고 서서히 체력은 떨어져 갔다.
90km 정도 달렸을 때 작은 음식점 하나가 나타났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들른 휴게소에서 Antuanet와 Harold를 만났다. 벨기에에서 온 선남선녀 커플은 한 달 동안 휴가를 내고 캠핑카를 빌려 미국 서부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사랑스러운 두 사람을 보며 나도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10여 분간 이야기를 나눈 뒤, 혹시 가는 길이 같으면 나를 잠깐 태워줄 수 있는지 물었다. 지도를 확인하니 10km 정도 가는 길이 같았고, 그들은 흔쾌히 탑승을 허락해 주었다.
고마워하는 나에게 그들은 “이것도 여행의 일부분이야”라고 말했다. 참 마음마저 예쁜 커플이다.
벨기에 커플과 작별하고 다시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했다.
내가 내린 곳은 차량 통제가 된 길이었는데, 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게 좋지만은 않았다.
물론 차량이 다니지 않으면 사고의 위험도 없지만, 내가 위험에 처한다면 나를 구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어느덧 태양은 중천에 떴고, 기온은 40도를 훌쩍 넘었다. 서서히 목젖이 따가워지며 탈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길에 그늘도 한 점 없어서 멈춰 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목을 타고 건조함이 올라왔지만 애써 외면하며 페달을 밟았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이대로 멈춰 섰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 이후의 일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등이 뜨거워져서 바닥만 보며 달렸었고, 갑자기 나른해졌던 것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곧 차가 한 대 지나갔다.
엔진 소리를 듣고 왼손을 들어 세차게 흔들었다.
나를 앞질러 간 차는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멈춰 섰다. 차에는 건장한 두 남성이 타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내 상황을 설명했겠지만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더위를 먹기도 했고, 이들을 놓친다면 나를 구해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참을성 있게 내 이야기를 들어준 John과 Junior는 마침 동쪽으로 가고 있다면서 흔쾌히 나를 태워주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내가 달리던 도로의 공사 작업을 맡고 있었고, 휴일에 작업장을 둘러보러 왔다가 우연히 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Junior는 이미 자전거 횡단을 하는 사람을 여럿 구출한 적이 있다고도 했다.
이 아름다운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카메라를 켜고 왜 호의를 베푸셨는지 여쭤봤다.
그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 너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니까? “
이 날씨에 사막을 건너는 건 무모한 짓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조금 더 아름다운 답변을 기대했었다)
아저씨들은 햄버거를 대접해 주시면서 내 건강 상태를 살펴주셨다. 너무 감사하게도 Junior는 집에서 하룻밤을 자도록 허락도 해주셨다. 여분의 침실이 있다면서 최대한 편하게 쉬고 가라고 하셨다.
미해병대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그의 집에는 해병대 사진과 다양한 무기가 가득했다. 덕분에 군대 이야기도 듣고 총도 처음 만져봤다. 샤워를 한 뒤, 서부의 명물인 인앤아웃 버거를 먹으니 컨디션이 돌아오는 듯했다.
용감하지 않고 무모했던 날이었다.
앞으로는 코스와 날씨 공부를 꼼꼼하게 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