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경험을 가지면 오랫만에 다시 그것을 하더라도 몸이 기억을 한다고 한다. 자전거를 한 번 탈 줄 알면 아주 오랫만에 다시 자전거를 타도 금새 다시 탈 수 있는 것과 같다고. 물론 의심병이 가득한 나는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주사를 잘 놓는다. 다시 출근한 소아병원에서도 주사를 꽤 잘 놓는 편이다. 왠만해서는 겸손한 척을 하는 나지만, 인정 할 것은 인정을 한다.
나 주사 쫌 잘 놓는다.
간호사 면허를 받고 처음 취업한 병원은 친정이 있는 천안의 대학병원이었다. 실습병원이기도 하였고, 소아과에서 1달을 일하다가 그토록 원했던 신생아실에 배정받게 되었다. 애도 안 낳아 본 내가 신생아실을 이토록 원했던 이유는 실습했을 때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서이다. 간호학생 때는 거의 모든 병원의 간호 파트를 2주 정도씩 실습을 하는데 그 중에서 신생아실이 유독 마음에 들었었다.
환자들 천지인 병원에 있으면 웃을 일이 있기는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아픈 환자를 돌보는 일이다 보니 텐션이 가라앉기 나름이다. 하물며 대학병원에는 질병의 중한 정도가 의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증이고, 환자의 상태는 금세 악화되기 일쑤이다. 중환자실에서 2주간 실습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실습 도중 다음 날 출근을 해 보니 한 환자가 자리에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 호전이 되어서 퇴원하거나 일반병실로 내려가는 것. 아니면 사망이다.
병원에서 일을 하다보면 인생 뭐 별거 없구나 하는 생각이 실습학생일 때부터 느껴졌었다. 사는 게 별거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성인군자처럼.
그러다가 신생아실 실습을 했는데, 약간 느낌이 신선하다고나 할까.
잊고 있었다. 병원은 출생과 사망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갓태어난 아기를 분만실이나 수술실에서 녹색포에 싸서 데리고 온다. 일단 석션을 하여 입안의 양수를 제거하여 호흡을 더 용이하게 해주면, 아기는 더욱 우렁차게 울음을 터트린다. 기본적인 처치가 끝난 아기는 보기만 해도 미소를 머금게 했다. 환상에 빠졌었던 거다. 이런 예쁜 아기들을 계속 보면서 일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실습학생에게는 정상 신생아실과 신생아 입원실의 아기들만 케어가 가능했다. 신생아 중환자실은 출입조차 못하던 때였으니. 어른 중환자실 뺨을 양쪽으로 때리는 것과 같은 난이도의 신생아 중환자실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나는 신생아실에 지원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감히 나는 중환자실 중에서 신생아 중환자실을 지원을 했었던 거였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5년 즈음 근무하면서 얻은 기술 중의 하나가 정맥주사이다.
일반인들이 흔히 말하는 혈관주사를 나는 꽤 잘 놓는 편이다. 어른들은 혈관이 좀 굵은 편이다. 주삿바늘 사이즈에 비하면. 물론 아주 혈관이 얇아서 잘 터지는 경우도 있지만 왠만하면 거의 한 번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내 기준으로 보면 신생아는 그 난이도가 조금 더 높다. 생각보다 갓 태어난 신생아들은 주사 놓기가 수월하다. 조금 마른 편인데다가 한 번도 주사를 맞아보지 않아서, 마치 깨끗한 눈밭을 밟는 기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장기입원하는 아기들은 나중에 주사놓을 혈관이 없기는 하다.
나의 주관적인 견해로는 가장 최상의 난이도는 신생아실보다 소아과라고 하겠다. 요즘 다들 소아청소년과라고 하는데, 신생아 기간을 지난 1달 이상 된 아기부터 미성년자이면 다 진료가 가능하다. 이 중에서 가장 최상의 난이도의 아이는 돌쟁이 정도부터 두 돌까지 되겠다. 포동포동 젓살이 올라서 온몸이 살로 뒤덮힌, 소세지 같은 팔을 가진 아이들 말이다. 혈관이 살에 파묻혀서 도대체가 어디에 혈관이 있는지 잘 만져지지도 않을 때가 많다. 거기다가 힘은 얼마나 센지 주사를 맞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니 간호사 혼자서 주사를 놓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주사를 안 맞겠다고 필사적으로 초인적인 힘을 내는 아이를 움직이지 않게 고정을 시키기는 일은 만만치가 않다. 퇴근 할 때 즈음에는 공사판 일을 한 사람처럼 여기저기 근육이 쑤시곤 하니까.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안 믿으실 수도 있겠지만, 죽기살기로 주사를 안 맞겠다고 버둥대는 아이의 힘은 어른 세 넷이 감당하기에도 초인적이랍니다.
이런 오동통 살이 오른 귀여운, 힘센 아이들을 나는 매일 울리고 있다. 물론 치료 목적으로 주사를 놓기 위한 합법적인 이유로 말이다. 주사를 놓겠다는 나와 안맞겠다고 기를 쓰는 아이와 씨름을 하면 결국에는 당연히 내가 승리를 한다.
이렇게 갈고 닦은 실력으로 나는 경력이음에 성공을 했고, 출근 첫날부터 10명의 아이 중 9명의 주사를 한 번에 성공했다. 오직 1명의 아이만이 나에게 두 번 찔림을 당했다. 사람에게 100% 성공은 없는 법이다. (다 한 번에 해주고 싶었는데, 잘 안되었어요.) 많이 잊어먹은 줄 알았던 간호기술이 다시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다시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