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 처음에는 다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장 돈을 벌어야 했고,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나이 먹은 것은 인정하고, 병원 경력 짧은 것도 인정하고... 하지만 병동 내에서 나의 위치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낮았다. 병원경력 상 서열로 따지자면 내 아래의 연차 직원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친구는 경력 3년 차의 27살의 신규 직원이었다. 허허허. 기가 막힌다. 27살짜리 애기 간호사 다음에 나... 그 위로 경력이 짱짱한 간호사들이 포진해 있다. 직장 내에서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지, 서열이 뭐가 중요하냐고 병원밥을 제법 먹어 본 나에게 묻는다면 그건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출근하기 전에도 생각은 했었지만 실제로 마주친 현실은 나를 불판 위의 오징어처럼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드라마에 종종 나오기도 하더라. 살짝 억울하기도 하여 나의 입장을 말하자면 나는 강사 경력이 10년 즈음인데 현실에서는 간호사로써 병원경력이 아니면 가뿐히 도려내진다. 그래 뭐, 난 여기 있는 간호사 선생님들보다 강사 경력은 더 많아. 다른 장점도 있단 말이지.
더욱이 나는 경력단절 간호사여서 경력은 짧고 나이는 많다. 그래서 나보다 나이 어린 간호사가 내 윗 연차로 여럿, 아니 아주 많이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서 경력이 많으면 오케이, 인정! 하나 나이도 어린데 윗 연차라는 것은 일 할 때 서로 불편하고 민망한 상황이 계속될 수도 있다. 경력간호사라고 해서 왔는데 나이는 많아서 서로 존댓말을 해야 하고, 일을 시키기에도 부담스러워지는 것이다. 이럴 때 해결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내가 알아서 눈치껏 일을 찾아서 알아서 하는 수밖에. 그리고 그들과 친해지려 내가 먼저 다가가려 노력해야 한다.
간호사들은 같은 병동 속에서 협업으로 일을 해 나간다. 내가 다니는 의료기관은 대학병원이 아닌 소아병원이다. 우리나라의 대학병원은 인건비가 저렴한 신규 간호사만을 뽑는 곳이 대부분이고, 나 같은 경력직을 뽑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허나 나를 뽑는다 하더라도 집안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이 어마무시한 강도의 대학병원의 업무를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경력직 간호사들은 페이가 적더라도 업무강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작은 병원으로 옮기는 경우가 흔하다. 나 또한 작은 병원에서 경력이음을 시작한 것은 너무 힘들지 않게 일을 해야 오래 다닐 수 있음을 인지한 탓일 것이다.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간호사 일을 나눠서 하는 경우가 많다. 간호사는 근무시간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서 챠지널스와 액팅널스로 나뉜다. 차지널스는 경력 높은 간호사로 근무 시간에 전체적인 환자 파악을 하고, 의사의 지시를 컴퓨터로 확인한 후, 액팅널스에게 업무를 지시한다. 액팅널스는 주사를 놓는다던지, 환자교육을 한다던지 실제로 환자에게 간호를 시행하는 식으로 업무는 나뉜다.
내가 재취업을 한 병원에서 나의 역할은 당연히 액팅널스이다. 하루 종일 환자와 마주하며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의사에게 보고할 내용이 있거나 하면 일단은 챠지널스에게 보고를 한다. 이렇게 직접간호를 하면서 근무를 한다.
나와 같이 근무하는 대부분의 간호사들은 최소 15년 차 이상이다. 15년 차 이하의 간호사는 나와 막내를 포함하여 딱 3명뿐 이다.
처음에 일을 시작했을 때는 내가 너무 저 연차의 간호사라는 사실에 조금 속상한 적이 있었다. 가장 속상할 때는 예상 가능하겠지만 당연히 월급날이다. 연차가 낮다는 것은 월급도 역시 적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러나, 이런 나의 서운함은 출근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에 사라져 버렸다. 물론 내가 경력이 짧아서 액팅을 하는 것은 당연한 거였다. 응급상황이 생기거나 간호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생길 때, 보호자의 문의 사항에 대처하지 못해 쩔쩔맬 수 있는 상황에 빠지려 할 때 윗 연차 선생님들이 오셔서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 주고 가신다. 나이란 상관없는 것이다. 역시 경력간호사가 베테랑이라는 것은 이런 상황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하지 않았지만 나는 임상에서 벗어난 기간이 너무 오래되어서 정말이지 신규티를 갓 벗은 간호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15년이라는 기간은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다. 지금 나는 같이 근무하는 간호사 선생님들 모두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나도 이런 간호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가 나이가 많기는 한가 보다. 재취업한 병원에 예전에 지인으로 알 던 간호사와 같이 근무를 하고 있다. 나랑 같은 나이. 나이도 동갑이고, 같은 중학교 1학년의 1호를 키우고 있어서 공감대도 많다. 일상에서 다시 만났더라면 깔깔거리는 사이였을 테지만, 병원에서의 그녀와 나의 상황은 아주 많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