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나 스왑, 옵션 기타 다양한 금융 파생상품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공동체에 어떤 종류의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선물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나라에서는 밭떼기가 가장 생활밀착형 선물일 것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배추를 심으면서 상인과 다음과 같은 계약을 한다. '나중에 수확할 시기가 오면 배추 한 포기를 3,000원에 팔겠다(상인 입장에서는 사겠다).' 수확할 시기가 되어 배추 한 포기에 3,000원이 넘으면 농부는 3,000원 이상에 팔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머금고 상인에게 배추를 팔아야 한다. 반대로 가격이 낮게 형성되면 농부가 유리한 계약을 체결한 것이 된다. 이 사례에서 밭떼기 거래를 하는 상인이 존재하지 않아도 배추는 시장 가격에 거래된다. 배추가 6,000원이나 7,000원으로 오르면 상인 개인으로는 '영민하다'라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그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농민의 이익을 편취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것은 불확실성에 의존하는 일종의 도박이다. 미래를 읽을 수 있는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고작 남의 이익을 편취하는 일에 재능을 쏟는 것이라니, 그리고 그것을 '영민'하다고 찬양하는 꼴이라니, 참으로 안타깝다. 여기에서 파생된 금융상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것은 투자의 귀재들도 '금융시장의 재앙'이라고 말할 정도이니 그것이 우리 공동체에 미치는 악영향은 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다주택도 마찬가지이다. 주택은 준공공재이다. 얼마 전까지는 주택을 100채 소유하면서 부동산의 귀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젊은이의 롤모델인 적이 있었다. 백 년 후의 세대가 이런 우리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 것인지 잠시만 생각해도 쉽게 알 수 있다. 동학 농민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고부 군수 조병갑은 만석보를 만들어 만석보의 물을 쓰는 농민들에게 거액의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 과정에서 불법을 저지르지 않았으니(당시 조선의 관행이 허용하는 범위였다) 조병갑을 '영민'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고종에게 중용되어 고등재판소 판사까지 되었고,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그리고 고작 100년이 지난 지금 조병갑은 역사책에서 나오는 인물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악인이다. 지금부터 100년 후에 '엄마, 2022년에는 사회보험료조차 내지 못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을 100채나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는 게 사실이에요?'라고 아이들이 묻는다면 우리 손자들은 2022년을 얼마나 야만의 시대라고 아이에게 알려주겠는가? 그리고 빌라 전세금으로 사기행각을 벌이는 속칭 '빌라왕'은 어떻게 묘사될 것인지 꼭 100년이 지나 봐야 아는 것은 아니다. 다주택에 대한 중과세가 있다면 이런 행위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공동체를 위한 통합의 공간
현재 우리 공동체는 완전히 깨지고 분산되어 있다. 우리의 공동공간은 완벽하게 계층화되어 있어서 상위 계층이라는 지위를 취득하거나 그것을 감당할 경제적 여력이 있지 않은 한, 상위의 공간에 범접할 수 없다. 부유한 사람의 자녀는 어릴 때부터 사립초등학교, 자라서는 특수목적 고등학교에 입학하거나 유학을 간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사람의 자녀는 하루 종일 어린이 집에만 있다가 내던져지듯 일반고교로 진학한다. 이들 사이의 분리는 단지 공간적 거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곳에 살아도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입학을 거부하는 사례나 '저소득층이 사는 동네' 아이들과는 놀지 말라고 교육하는 부모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괴담처럼 살아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공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를 위한 통합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더 많은 종류의 특화된 도서관이 필요하다. 도서관이야말로 빈부, 노소에 관계없이 다양한 지적 활동이 촉발되는 곳이다. 더 빠르고 값싸면서 쾌적한 대중교통의 확충도 우리에게 공동체의 공간으로 남을 수 있다. 대중교통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은 편리함을 증진시키는 것 못지않게 유대감과 공동체 의식을 고양시킨다. 기관이 운영하는 공간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각자의 집과 사무실이 수준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살롱이나 카페가 될 수 있다. 나는 사무실 한 층을 시민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공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생각보다 실현은 참 쉽지 않다).
거래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죄악세
리셀러, 되팔렘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인기 있는 제품을 오픈 런open run해서 구입한 다음(사재기가 가능한 것인지는 관심이 없어서 알지 못한다), 그것에 이윤을 붙여 되파는 사람을 낮추어 이르는 신조어다. 그들은 '나는 그 물건을 가장 갖고 싶은 사람에게 팔았으니 공리를 최적화한 것이다'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하지만 그 물건을 '가장' 갖고 싶은 사람은 '가장 높은 가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을 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가장 많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현주소이다. 누군가는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누군가는 그저 줄 서고 기다리는 것이 싫어서, 불필요한 소비를 한다. 그리고 그런 소비가 공동체에 미치는 악영향은 분명하다. 그러니 리셀러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직업적으로 물건을 되파는 행위에 대한 죄악세를 부과해야 한다. 그리고 경제학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일부 한정 제작 상품에 대해서는 선착순보다 추첨제에 따라 판매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 금융상품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은 없지만 상법 교수로 재직했던 8년 전의 가물가물한 기억을 잠시 꺼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