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원에서 Aug 12. 2021

0127로 외운 글자

내가 받은 유산

 닮은꼴 찾기

 

한글을 가르쳐 보기 전까지는 겹받침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르치려고 보니 제법 많다. 아직 한글 모양이 눈에 익지 않은 학생들에게 받침이 2개나 있는 겹받침은 외우기 힘든 글자이다.

 예전에 가르친 일본 학생이 글자를 쓰면서 조용히 숫자를 읊조렸다.

“제로 이치 니 나나(0127)”

뭘 쓰나 봤더니 ‘읽다’를 쓰고 있었다. ‘읽’을 쓸 때마다 ‘ㅇ, ㅣ, ㄹ, ㄱ’ 4개의 위치를 자꾸 틀리게 되어서 숫자 0127로 외웠다고 한다. 학생 눈에 ‘읽’은 1층에 2개, 2층에 2개 총 4개의 글자를 써야 하는 글자인데 그 자리를 외우는 것이 꽤 어려웠던 모양이다.

 ‘갈아 만든 배’라는 한국 음료가 외국에서 idh’로 불린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캔에 적힌 ‘배’ 글자의 ‘ㅂ’이 외국인들 눈에는 ‘id’처럼 보이고 ‘ㅐ’는 ‘h’로 보인다고 한다. ‘명작’이 ‘띵작’이 되고 ‘멍멍이’가 ‘댕댕이’가 되는 그런 느낌이다. 요즘 아이들이 신라면을 푸라면이라고 부른다는 이야기를 한번 듣고 나니 라면 봉지에 있는 ‘辛’이 ‘푸’ 같아 보인다.

 새로운 것을 보면 내가 아는 것 중 그것과 비슷한 닮은꼴을 올리게 된다. 그래서 한글을 외울 때 영어가 익숙한 학생들은 모음‘ㅐ’는 알파벳 ‘H’, 자음 ‘ㅌ’은 알파벳 ‘E’로 모양을 기억하며 열심히 외운다. 외우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게 하나라도 있면 고마운 일이.


제자리에 두기


 한글을 배우는 시간에 처음 보는 신기한 글자를 마구 만들어 내는 학생들 있다. 마치 거울 모드처럼 자음과 모음의 위치를 서로 바꿔 쓰거나 한두 획이 빠진 허전한 글자를 쓴다. 한글을 가르칠 때는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에 있는지를 확인하느라 눈이 바빠진다.

 한글에 없는 자음이나 모음 글자를 만들어서 쓰는 학생이 있으면 ‘이런 글자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한글에 관한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이게 왜 여기 있지? 1459년에 간행된 석가의 일대기를 담은 책 ‘월인석보’에서 학생이 만들어 낸 글자와 매우 흡사한 글자를 보고 말았다. 그런 글자가 버젓이 있었다. 뭘 좀 아는 학생이었나? '이런 글자는 '지금은' 없습니다'라고 멘트를 바꿔야 할 판이다.


글자가 될 때까지


 외국어를 배우려면 먼저 글자를 익혀야 한다. 영어를 하려면 알파벳을 외워서 그걸로 단어도 쓰고 문장도 써야 한다. 물론 말을 먼저 배워서 회화가 유창한 문맹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순서를 바꿔서 내가 하는 말을 글자로는 어떻게 쓰는지 깨달아 가야 하는데 교포들 중에 그런 경우가 있다. 교포들은 보통 말하기와 쓰기의 실력 차가 많이 난다. 한국어를 많이 듣고 말할 수 있는 환경에 있으니 한국어로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편이다. 그러나 글을 보면 깜짝 놀란다. 내가 자연스럽고 유창하다고 생각했던 그 말들이 저렇게 틀린 맞춤법으로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 있었구나 싶어서 속은 기분마저 든다.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가 글자를 외우는 단계에서 포기했다는 사람도 종종 볼 수 있다. 글자를 외우려면 글자의 형태와 소리를 함께 외워야 한다. 어떤 글자를 보고 바로 소리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글자의 형태와 소리 사이에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생긴 글자가 이런 소리를 나타낸다는 것은 그냥 외우는 수밖에 없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학원에서 일본어를 가르칠 때 한 달 수업이 나갈 때까지 일본어 글자인 히라가나를 우지 못한 학생들이 있었다. 주로 직장인들이었는데 퇴근 후 학원에 오는 것이라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알지만 글자를 안 외우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사실 외우고 나면 히라가나는 몇 개 안 되는구나 싶지만 외울 때는 왜 그렇게 많아 보이고 글자들이 다 비슷하게 보이는지. 계속 히라가나를 못 외운 채로 학원에 오는 학생이 있어서 다음 시간까지는 꼭 외워 오라 당부했다. 외웠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음 시간에 오자마자 히라가나 카드를 들고 무슨 글자냐고 물었다.

 대답이 바로 안 나와서 내가 물었다.

“초면인가요?”

“아뇨, 이거 봤는데요. 아...이렇게 산 같이 생긴 거. 뭐였지?”

산 같이 생긴 글자 ‘へ’를 ‘헤’로 기억해서 읽을 수 있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한국어의 자음은 음성 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글자를 만든 덕분에 글자와 소리에 연관성이 있다. 그래서 아예 연관성이 없는 글자보다는 외우는 것이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르치는 사람 입장에서도 자음을 가르치면서 ‘ㄱ’은 혀가 ‘ㄱ’ 모양이 되게 올려서 뒤쪽 입천장에 붙여라, ‘ㅁ’을 제대로 발음하려면 입술을 그런 모양으로 붙여야 하는데 지금 안 붙다는 설명을 할 수 있감사할 따름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모음도 단모음만 외우면 이중모음은 어렵지 않다. ‘아어오우으이애에’를 가르친 다음에 이중 모음을 가르치려고 '야여요유얘예'를 칠판에 쓰면 학생들이 글자 모양을 보고 어떤 발음일지 예상한다. 길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보통 쉽게 이해를 한다.  


 수업 시간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이야기가 나와서 휴대폰에 있는 천지인 자판에 대해 설명해 준 적이 있다. ‘하늘, 땅, 사람’을 상징하는 ‘. ㅡ ㅣ’으로 모음을 모두 만들 수 있고 가획 원리로 ‘ㄴㄷㄹ’과 같이 글자를 입력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한글이 정말 체계적이라고 학생이 감탄해서 내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뿌듯했다.

 



 어렸을 때부터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듣고 자랐고 한글의 창제 원리도 배웠지만 정말 한글이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라고 실감한 것은 한국어를 가르치고 나서부터였다. 체계적이어서 구성을 설명하기가 쉽고 글자의 형태와 소리를 연결해서 설명할 수 있다.

 한글을 가르치는 날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의 혜택을 제대로 누려 보는 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