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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에서 Feb 25. 2022

무슨 영화를 볼까요?

 친구가 일에 회의가 느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과 번아웃이 왔다며 슬럼프라고 했다. 이제 와서 직업을 바꿔야 하나 싶고,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해서 공무원 시험을 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이 슬럼프를 어떻게 통과해야 하냐고 묻길래 자세를 낮추고 몸을 동그랗게 만들라고 했다.

 나의 대답이 철학적이라며 친구가 매우 마음에 들어 하고 자세를 낮추지 않으면 이 시기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맞다며 깨달음을 얻기까지 해서 당황스러웠다. 용한 점집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일까? 별 의미 없이 한 말에 본인이 의미를 듬뿍 넣고 자기 상황에 맞게 해석하면 쉽게 용해지는구나.


 슬럼프가 오면 쉬는 것이 답이겠지만 당장 월급이 안 들어온다고 생각하면 얌전히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출근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 직장인의 마음이다.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재미를 느끼며 일할 때도 있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오래 일을 하다 보면 힘들어서 못 해 먹겠다 싶을 때도 있고 지겨워서 못 해 먹겠다, 더럽고 치사해서 못 해 먹겠다 등등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여러 나라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새롭고 재미있어서 좋았다. 일반 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 지루하지 않아서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계속 새롭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든 반복되면 지루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회사처럼 업무가 연계되지 않고 각자 맡은 수업만 하면 될 것 같지만 같은 레벨을 가르치는 사람끼리 미리 정해서 통일할 것도 있고 시험 출제 등 여러 사람이 논의해야 하는 업무도 생각보다는 많다.  


 대학원에서 배울 때는 그렇게 배웠다. 수업을 할 때는 흥미를 유발할 수 있게 <도입>하고 문법을 <제시>해서 설명하고 <연습>을 한 후 <활용>할 수 있도록 수업 단계를 구성해야 한다고. 그러나 실제로 일을 해 보면 제시간에 진도를 다 나가기 빠듯해서 <도입> 같은 것은 할 겨를이 없다. 하루에 배워야 하는 교과서의 분량이 많아서 갈 길이 바쁘기 때문이다. <도입> 어쩌고 하면서 여유를 부리다가는 팀티칭하는 선생님에게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

 ‘한국어 교육의 이론과 실제’와 같이 ‘이론과 실제’라는 제목의 책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것이 제목에서 이미 스포가 되었군.

 다른 직종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어디에나 있지 않을까. 현실이 이론과 이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쉬운 면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너무 지쳐서 기운이 하나도 없이 강사실 자리로 돌아왔다. 강사실 복사기 옆에 있는 이면지 글자가 다른 의미로 읽혔다.

‘11과 무슨 영화를 볼까요?’ 그래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지금 이러고 있나. 한국어는 가르쳐서 뭐 하나 부질없게 느껴졌다.  

 예전에 했던 TV 프로그램 ‘비정상회담’에서는 외국인들이 자기 의견을 술술 말했지만 그렇게 유창한 한국어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학생이 실제로는 많지 않다. 보통은 한국어로 말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데에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나도 어디 가서 먼저 말하는 성격이 못 되니 이해는 하지만 연습을 하려면 말을 해야 해서 학생의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나에게 야근도 없고 일하는 시간도 짧아서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야근의 고통은 못 느껴 봤지만 퇴근하고도 수업 준비를 해야 하는 고통이 있다. 그리고 일하는 동안의 체력 소모량은 강사 쪽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회사는 회사대로 힘들고 학교는 학교대로 힘들다.




 20년 정도 하고 나니 지친다. 이제 일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니 누가 그랬다. 사람이 품을 팔아 돈을 버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그렇게 벌어서는 기력이 소진되고 힘들어 많이 벌지도 못하니 내가 쉴 때도 돈이 꾸준히 벌어져야 한단다. 내가 쉴 때 나의 주식이 나 대신 부지런히 뛰어준다든가, 내 건물이 나 대신 서서 임대료를 벌어 준다든가.

 건물은 없고 주식은 요즘 너무 파란데 어쩌지...

 내가 직접 뛰고 내가 서 있느라 그동안 힘들었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나도 살짝 슬럼프가 오려고 한다. 빨리 자세라도 낮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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