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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다 Aug 16. 2024

홍콩 로컬바에서의 볶음밥과 펀주

전 회사인 H건설사는 유달리 애주가가 많은 회사였다. 4년 전, 첫 출근을 하던 날이 떠오른다. 탕비실 냉장고를 열자 냉장칸의 절반이 캔맥주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옆 선반에는 먹다 남은 글렌피딕 12년 산 반 병.

당연히도 나는 그 분위기에 몹시 빠르게 적응했다.

어느 날은 저녁에 편의점에서 나는 와인을, 옆자리 직원은 캔맥주를,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소주를 사 와 짠! 을 한 후 각자 자리에서 자작을 하며 작업을 했다. 그러다 한 시간쯤 지나면 다시 짠! 을 하고 술을 마시며 작업에 열중했다. 탕비실에는 소주잔은 물론 와인잔도 구비되어 있었다.

오늘 만난 L은 당시 소주를 마시던 인테리어팀 디자이너다. 험난한 업무 속 절망에서 피어난 우애와 술에 대한 지독한 애정으로 우리는 퇴사한 이후에도 몇 달에 한 번은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저 오늘 맛있는 술 마시고 싶어요. 언니가 데려가줘요.”

L의 요청에 서울대 입구에 위치한 몽중인으로 향했다.

몽중인은 과거 영화 쪽 pd를 하던 사장님이 중경삼림을 모티브로 직접 인테리어를 한 홍콩식 로컬바이다.

간판부터 내부의 타일, 색감, 분위기, 음악 모든 곳에서 홍콩 뒷골목의 내음이 물씬 풍겨난다.

식당의 입구 쪽 코너에 있는 거대한 푸른 어항 안에는 비행기 모형이 들어가 있다.

영화 중경삼림에서 양조위가 스튜어디어스이던 헤어진 여자친구와 함께 가지고 놀던 비행기 모형을 왕페이가 어항 속에 넣은 장면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는 걸 식당을 방문한 지 4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L와 내가 바 테이블에 앉자 사장님이 시원한 둥굴레차 두 잔과 피스타치오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몽중인에서는 홍콩식 음식 외에도 12가지 종류의 고량주를 판매하고 있다.

첫 잔으로는 항상 펀주를 주문한다. 펀주는 청향형 백주로 53도인 높은 도수와 달리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운 청량감을 가지고 있다.

작은 유리잔에 담긴 펀주와 함께 둥글고 큰 얼음이 들어있는 언더락잔, 그리고 앙증맞게 썰린 자두가 서비스로 나왔다. 이게 바로 6년 단골의 저력이다.

L가 언더락잔에 고량주를 부으려 해 황급히 저지했다.

“펀주 처음이잖아. 우선은 그냥 마셔보고 반쯤 남으면 그때 얼음에 부어 마셔.”

“아, 역시!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할게요.”

맞은편에서 마른행주로 접시를 닦고 있던 사장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너무 믿지는 마세요.”

사장님의 말은 무시하고 잔을 부딪힌 후 펀주를 한 모금 마신다. L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언니! 너무 맛있어요! 뭐야? 저 이렇게 맛있는 고량주 처음 마셔봐요.”

“내 추천은 항상 실패하지 않지.”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사장님이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저녁을 먹고 배가 잔뜩 부른 상태로 왔지만 펀주를 세잔정도 마시니 허기가 진다.

메뉴판을 보며 뭘 주문할까 고민한다. 양갈비는 너무 무겁고 배추찜이나 춘권을 시킬까 하다 첫 페이지에 신메뉴로 크게 적힌 중화 볶음밥이 눈에 띈다. 볶음밥은 그리 선호하는 편이 아니지만 최근 사장님이 자신의 SNS에 하루가 멀다 하고 볶음밥 최고!! 난 볶음밥 중독자, 볶음밥 마스터라고 올렸던 게시물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 한번 먹어주자 하는 마음으로 볶음밥을 주문했다.

오목한 타원형의 그릇에 담긴 고슬하고 기름진 볶음밥이 테이블 위로 등장했다. 숟가락으로 볶음밥을 떠 입안에 넣는 순간 L와 눈이 마주친다. L의 동그랗게 커진 눈처럼 내 표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베이컨과 마늘쫑, 새우.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씹힌다. 다시 한 입 먹는다. 깨닫는다. 명란이다.

볶음밥이야 뻔한 맛이지 생각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다시 한 입 먹는다. 이런 감칠맛은 처음이다.

입에 가득 밥을 넣어 천천히 씹은 후 언더락잔에 넣은 시원한 펀주를 한 모금 마시자 매주 이곳에 와 볶음밥을 먹겠다는 결연한 다짐이 섰다.

L이 화장실에 간 사이 사장님에게 슬쩍 펀주 한 병 포장을 요청했다.

가게를 나서기 전 박스에 담긴 펀주를 선물로 내밀자 행복한 표정을 지은 L가 내 등짝을 서너 번 때렸다. 애정하는 이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에도 몽글몽글한 기분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등이 몹시 아팠다. 역시 행복에는 고통이 수반되는 것일까?

가게 앞에 L이 부른 택시가 도착했다. 헤어지기 전 포옹을 하고 오늘 너무 즐거웠다는 인사를 나눈다.

L이 가는 모습을 지켜본 후 택시를 호출하며 생각했다. 다른 애정하는 이와 이곳에 다시 와 펀주에 볶음밥을 먹어야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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