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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다 Aug 02. 2024

집에서의 위스키

“우리 집 가서 한잔 더 할래?”

생맥주 두 잔과 화요 한 병을 비운 직후였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K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마셨던 이자카야에서 집은 그리 멀지 않은 위치였다. 택시가 익숙한 골목에 진입했을 때쯤에야 뒤늦게 집 안의 상태가 떠올랐다.

“편의점에서 뭐 좀 사 올까?”

택시에서 내린 K가 말했다.

“응, 너 먹고 싶은 걸로 사 와. 최대한 천천히.”

다행히도 눈치가 빠른 K는 내 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모양이었다.

K가 편의점으로 향하는 동안 재빨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어수선한 물건들을 전부 서재에 밀어놓고 방 문을 닫았다. 이제는 서재라 불러야 할지 봉인된 창고라 불러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다.

10분 만에 서재를 제외한 집 안이 말끔한 상태가 되었다. 때맞춰 K가 인터폰을 울렸다.

K의 손에는 크래커, 초콜릿, 육포, 아이스크림이 들려있다.

크래커의 봉지를 뜯어 접시 위에 올려두고 오목한 그릇에 직접 만든 바질페스토를 담았다.

첫 술로는 우드포드 리저브를 꺼냈다. 우포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우드포드 리저브는 미국의 버번위스키이다.

찬장에서 동물머리가 주석으로 장식된 위스키잔을 꺼냈다. K는 산양, 나는 토끼다. 위스키를 따르고 잔을 부딪히자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키자 부드럽지만 강한 바닐라와 캐러멜향이 입 안을 가득 에워싼다. 크래커 위에 바질페스토를 듬뿍 얹어 입안에 넣었다. 크래커의 담백하고 바삭한 식감, 바질페스토의 고소하고 산뜻한 맛이 위스키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3주 전 승진한 K는 끝없는 회의와 미팅의 늪에 빠져있다고 말했다. 한 주간의 노고만큼 빠르게 위스키잔이 비워졌다.

취기가 올라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주전자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면 불을 끄고 찻잔을 덥힌 뒤 물이 조금 식기를 기다린다. 한 김 빠진 물을 유리저그에 담아 세작 두 스푼을 덜어냈다.

알맞게 우려진 따듯한 녹차가 취기와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뜨개 레이스 테이블보가 깔린 식탁 위는 잔들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반쯤 남은 위스키잔을 비운 후 녹차를 한 모금 마신 K가 말했다.

“너희 집 분위기가 개미지옥 같아.”

“어떻게 알았어? 그 말 정말 많이 들었는데.”

몇 마디의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을 동안 우포리 병은 완전히 비워졌다.

K가 사 온 초콜릿 대신 얼마 전 선물 받은 오랑제뜨를 꺼냈다. 오렌지필에 초콜릿을 코팅한 오랑제뜨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 안주이기도 하다.

잠시간의 고민 후 아드벡 코리브레칸을 골랐다. 57.1도인 코리브레칸은 피트 위스키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위스키로 손꼽힌다. 운동으로 치자면 격투기의 강펀치 같은 타격감이다. 훈연과 스모키함이 식도를 가격한 후 화사한 향과 약간의 염도가 남는다.

접시에 올려둔 오랑제뜨를 한 입 먹는다. 압축된 오렌지의 달콤함과 위스키의 피트향이 서로를 해지지 않으면서 각각의 존재감을 강하게 내뿜는다.

감탄을 하고 있는 K에게 말했다.

“내일은 뭐 할 예정이야?”

“하루종일 월요일 회의준비해야 해. 너는?”

“난 내일 위스키 시음회 가.”

“오늘 이렇게 마시고? 독하다.”

“주말 내내 일해야 하는 너도 독해.”

코리브레칸의 향과 맛은 지나치게 강렬해 더 이상 다른 술은 마시지 못한다. 나른한 표정을 한 K가 택시를 불렀다. 당분간은 끝없는 회의의 늪에 빠져있어야 할 K가 오늘만큼은 충만한 하루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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