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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온 천지람

by 차다

지인 H가 상해 출장지에서의 사진을 보내왔다. 액정에 8장의 사진이 펼쳐졌다. 고층에서의 화려한 도심의 풍경을 제외한 나머지는 정교한 코스 음식사진들이었다. 전시장에 올려진 작품 같은 플레이팅을 보며 H에게 답장을 보냈다.


사진 보고 너무 부러워서 울면서 잠들었어.


농담기라고는 없는 진지한 대사였다. 내 메시지를 본 H는 몇 번이고 웃었다며 청담에 위치한 중식당을 예약해 주었다.

금요일 저녁, 우리는 식당 앞에서 만났다. 1월 말의 늦은 저녁시간이었고, 눈가에 살얼음이 맺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겨울 끝자락의 추위가 매서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리자 곧장 레스토랑의 내부가 나타났다.

벽면의 대부분은 잿빛의 세로로 긴 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창가의 블라인드는 전부 내려져 있어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다. 유일하게 빛을 밝히는 건 테이블마다 설치된 둥근 조명과 한자로 쓰여진 붉은 네온사인뿐이었기에 어둠에 잠긴 중국 어딘가의 거리에 있는 식당을 옮겨놓은 듯한 인상을 자아냈다.

중앙의 오픈 키친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의 바테이블이 있고, 넓은 홀에는 검은 원탁과 검붉은 벨벳 소파가 배치되어 있다. 웨이터가 그중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바 테이블 자리로 안내했다. 그 자리에서는 오픈키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H가 북경오리 한 마리와 고수무침을 주문했다. 앉은자리의 너머의 오픈키친에서는 단정한 흰색 조리복을 입은 직원이 힘찬 동작으로 수타면을 치대고 있다.

“음식은 못 가져오니까 대신 그날 마신 술을 사 왔어.”

큼지막한 박스를 꺼내며 H가 말했다. 박스 안에서 우아한 굴곡을 한 짙은 푸른색의 병이 나왔다. 52도의 천지람이라고 H가 덧붙였다.

때맞춰 테이블에는 저민 오리껍질과 고수무침이 올려졌다. 진한 갈색으로 구워진 껍질을 굵은 설탕에 찍어 한 입 먹어보았다. 얇고 바삭한 식감과 함께 고소한 기름의 풍미가 입안 가득 찼다. 곧장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유리잔에 담긴 천지람을 한 입에 들이켰다. 높은 도수임에도 향긋한 과실향이 깔끔하게 넘어간다.

대화를 멈추고 오리껍질과 고수무침, 천지람을 먹기를 반복했다.

뿌듯한 표정을 한 H가 말했다.

“맘에 들어?”

“완벽한 조화야.”

뒤이어 손질된 오리와 종잇장처럼 얇은 밀전병, 채 썬 파와 오이. 추가로 주문한 소총홍소어가 세팅되었다. 직원이 좁은 테이블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능숙하게 정리했다.

전병에 싼 오리를 먹어도, 소스에 절여진 생선살을 발라내 먹어도 후에 이어지는 천지람은 변함없이 명쾌하다. 높은 도수임에도 부드러운 질감의 고소한 맛에 잇따라 과일의 상쾌함과 은은한 단맛이 감돈다.

천지람은 바다보다 넓은 하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상해에서 한국까지의 거리는 820km. 푸른 병에 담긴 천지람을 바라보며 H의 여정을 상상해 본다.

투명한 액체 속에 820km의 하늘이 압축되어 있는 것만 같다. 입안에 남아있는 잔 향은 단순한 백주가 아닌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하늘의 정경과 H의 마음을 담아낸 애정이 녹아있다.

식사를 마쳤지만 천지람은 반 병가량 남아있다.

“널 위해 사 온 거니 집에 가져가서 마셔.”

H가 말했다.

잠시 H가 내뱉은 문장을 곱씹었다. 내가 받은 건 어쩌면 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상해부터 이어진 그 시간, 흘러가고 있는 지금의 시간.

언젠가 병은 비워지겠지만 천지람의 강렬한 맛과 향처럼 오늘의 기억은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상해가 아닌 이곳, 서울의 어느 한 식당에서 한 모금 한 모금, 천지람이 혀 끝에서 맴돌다 목 너머로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상해의 밤을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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