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는 우리 전통대로 할까?”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D가 말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오랜만이네.”
밤 11시 40분. 우리는 이미 와인 두 병을 비우고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카멜색 코트를 입은 D의 뒷모습이 잠시 휘청이고 기계음과 함께 1층 유리문이 열렸다.
“여기로 언제 이사한 거야?”
내가 물었다.
“한 달 정도 됐어.”
D가 대답하며 복도의 간접등을 켰다. 희미한 조명이 어둠을 가르며 켜졌다.
사무실 안을 들어서자 갓 공사한 직후의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윤이 나는 흰 책상 위의 모니터들은 모두 검은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아직 페인트 냄새가 나네.”
“창문 좀 열까?”
“추우니까 그냥 둬. 알콜로 코를 마비시키면 되지.”
와인을 흔들며 D에게 말했다.
가장 안쪽 자리로 나를 안내한 D가 스탠드 불을 켜고 원형 테이블 위에 올려진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비어진 테이블은 곧 편의점에서 사 온 화이트와인, 치즈, 과일로 채워졌다.
발목께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나 내려다보니 흰털과 검은 털이 섞인 고양이가 소리 없이 다가와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또쿠라는 이름의 이 고양이는 5년 전 회사 근처를 서성이다 언젠가부터 집고양이, 아니 회사고양이가 되었다고 한다.
또쿠가 회사고양이라면 우리는 회사에 몰래 숨어 들어온 도둑고양이일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인위적일 만치 고요한 사무실은 묘한 긴장감을 줬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다 D에게 말했다.
“내가 좋아할 만한 음악 틀어봐.”
“오케이.”
키보드를 뒤적이던 D가 FLAMME DE SÉOUL의 Oiseaux de nuit를 틀었다. 독특한 리듬의 비트가 고요한 사무실을 채웠다.
“전에 내가 추천해 준 노래네? 요즘에도 들어?”
“당연하지. 신곡 기다리다 백번도 넘게 들은 거 같아.”
D가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도둑고양이었던 우리는 이제 밤의 올빼미들이 되어 화이트와인이 담긴 머그잔을 부딪혔다. 이름 모를 와인에 기묘한 흥분과 비밀스러운 기분이 스며들어 어느 술보다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미각은 음식의 분자들이 혀의 표면에 있는 미뢰와 접촉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실제로 느끼는 미각은 상대와 이어지는 대화, 상황의 맥락, 손끝에 닿는 온도, 귓가에 맴도는 소리, 지금 느끼는 감정의 고도.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더해져 증폭된다.
D가 마지막 남은 와인을 내 컵에 따랐다. 한입에 들이킬지 아껴둘지 고민하다 D에게 말했다.
“넌 내일 몇 시에 출근해?”
“음. 오전에서 점심즈음?”
“직장인은 서러워지는 말이네.”
“9시 출근이지? 괜찮아?”
“괜찮아. 기껏해야 네 발로 출근하겠지.”
“괜찮은 거 맞아?”
“아무래도 좋겠다 싶은 때가 있잖아?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야.”
잠시 고민하던 D가 서랍 안에서 보드카를 꺼냈다. 새벽 3시, 아직 밤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