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지금 호텔인데 올래요?
어딘데?
광화문에 있는 F 호텔이에요. 지하에 있는 바에서 기다릴게요.
G의 연락은 늘 이렇다.
매번 가는 방향과 정반대의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역 8번 출구에서 내렸다. 두 블록을 지나자 빌딩들 사이로 처마 형태를 한 25층의 건물이 차갑게 빛나고 있다.
정문을 지나 로비로 들어서자 은은한 향기와 여러 장식들이 눈길을 잡아끌지만 목적지는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스피크이지바이다.
굳이 호텔 안에서 미아가 될 필요는 없다. 직원에게 위치를 물어보자 간판도, 어떠한 표식도 없는 입구 앞으로 안내했다.
벽면의 대리석과 동일하게 이어지는 은밀한 문을 열자 호텔 실내와는 다른 냄새가 느껴졌다. 어두운 조명과 흰색 정장을 입은 바텐더들, 붉은 옷을 입은 격식 있는 직원들, 타일과 기하학적 금속으로 장식된 복도를 지나자 가장 안쪽 테이블에 G가 앉아있다.
처피뱅의 검고 긴 생머리, 작은 얼굴 안에 들어찬 화려한 이목구비, 베르사체 츄리닝을 입은 G가 소파에 기대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이곳의 분위기와 완벽히 어울림과 동시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언니, 왔어요?”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G의 목소리는 술에 취한 듯 끝마디가 나른하게 늘어진다.
“먼저 한 잔 한 거야?”
“저번에도 그러더니. 제 말투 원래 이렇잖아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와인 한 병 주문했는데 여기 칵테일도 맛있어요. 마셔볼래요?”
“좋아.”
식전주와 꼬냑이 들어간 칵테일, 와인 한 병이 비워질동안 G는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알고 있는 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외양을 한 G는 그 외모를 압도하는 확고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G는 무엇을 입든, 무엇을 하든 그것이 과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인간인 마냥.
나른한 템포로 이어지는 G의 목소리를 들으며 평소보다 취기가 빨리 오름을 느꼈다.
“이제 그만 방으로 올라갈까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G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그녀는 난봉꾼이 분명할 것이라고. 또한 그것이 어울리는 인간이기도 하다.
문을 열고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갔다. 데스크 위에는 노트북이, 침대에는 옷가지가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고 벽면을 가득 채우는 통창 너머로 광화문의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갈대처럼 흔들리던 G가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술은 있어?”
“저기 있는 위스키 꺼내마시죠, 뭐.”
G가 미니바를 뒤지는 동안 나는 필립 글래스의 연주를 틀었다.
손안에 담겨있던 미니어처 위스키병들이 와르르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병을 하나 들어 라벨을 보니 맥캘란 12년이었다. 뚜껑을 열어 병째 한 모금 들이켰다. 쉐리 캐스크에서 숙성된 달콤한 과실향이 부드럽게 입안에 퍼진다. 이전의 취기와 섞여 순식간에 병이 비워지고, 두 번째 병을 여는 동안 G가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맥캘란을 마셨다. 에스프레소의 강렬한 쓴 맛이 지나간 자리에 맥캘란의 단 맛이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천천히 숨을 내쉬자 신선한 우디향과 스파이시한 여운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너는 나를 만나면 어떤 느낌이야?”
G에게 앞뒤 없는 질문을 건넸다. 그녀가 말을 고르는 사이 미니어처 술병 하나가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카펫 위를 구르다 멈춰 선 병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던 G가 말했다.
“예쁜 그릇, 잔, 독한 양주냄새, 아슬아슬한 조명, 뒷덜미를 잡아채는 느낌의 고상한 클래식. 작년에 언니네 집 처음 갔을 때 느꼈던 감상이 가장 강한 이미지로 남아있어요.”
“그래? 너무 좋다.”
지금의 기분으로는 G가 어떠한 말을 했어도 좋다고 대답했을 테지만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언니는요?’
“널 보면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 정리가 안 되는데. 최소한 맥캘란을 마실 때는 항상 네 생각이 날 거야.”
“호텔에 있던 술이 맥캘란이어서 다행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위스키거든요. 내 세상에 놀러와 하는 마음으로 언니를 불렀는데, 반쯤은 성공했네요.”
“오늘 많은 게 통했네.”
둔탁해진 혀끝으로 생략된 문장을 G에게 건넸다.
“아, 지금 엄청 담배가 피고 싶어요.”
한숨을 내쉰 G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고민하듯 느릿하게 몸을 뒤척이던 G가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고기와 먹으려면 한 병은 남겨놔야겠네라고 생각하며 맥켈란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창 밖의 광화문은 여전히 화려하고 굴곡진 도로 위를 끊임없이 내달리는 형체가 지나간다. 깜박이는 불빛 너머로 고개를 끄덕이는 G의 옆모습이 미끄러졌다.
“나 지금 정말 취했어.”
“저도 그래요, 언니.”
G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