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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듬수육전골과 레드와인

by 차다 Mar 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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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었던 것이 곧 비가 되었다. 혼몽한 정신 속에서 침대옆 유리를 때리는 빗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5시에는 시청역에서 S와의 약속이 예정되어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본 후 저녁을 먹으며 와인 한 잔 마시기. 두 시간이 남았지만 몸이 물에 젖은 솜마냥 무겁게 늘어져 도무지 침대에서 움직일 기분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 S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비도 오는데 따끈한 국물은 어때?

너 지금 나오기 귀찮구나?


오랜 친구답게 내 말의 요지를 정확히 짚는 답장이 왔다.


오해야. 갈게.

됐어, 비도 오는데 밥이나 먹자.


흡족한 마음으로 빗소리를 들으며 침대에서 30분을 더 누워있었다.

발목 부근까지 오는 긴 시스루 셔츠에 두꺼운 가디건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가디건에 물에 튀고 들고 있던 가방은 흠뻑 젖었다. 깨어진 약속의 일할 쯤은 지키기 위해 식당 근처에 있는 와인샵에 들렸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큰 키의 사장님이 다가와 찾으시는 게 있냐며 말을 걸어왔다.

“순대와 같이 먹을 레드와인 추천해 주세요.”

단번에 와인 한 병을 꺼내든 사장님이 말했다.

“무초 마스인데, 순대랑 같이 가볍게 마시기 좋을 거예요.”

“그걸로 할게요.”

5분 정도 걷자 S와 만나기로 한 식당이 나타났다. 검은색 폴딩도어와 연회색 페인트가 칠해진 입구 앞에는 신장개업이라고 쓰여진 붉은 종이가 붙어있다.

문을 열자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와 정갈한 오픈주방이 눈에 들어온다. 가게를 구경하는 동안 검은 정장에 은테안경을 쓴 S가 우산을 털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오는 길에 레드와인 사 왔는데 마실래?”

잠시 고민하던 S가 말했다.

“차 끌고 와서 애매한데. 우선 난 패스.”

잠깐의 협의 후에 수육모듬전골을 주문했다. 사장님이 둥근 전골냄비를 테이블 위에 세팅해 주었다. 뚜껑을 열자 한눈에 보기에도 진해보이는 뽀얀 육수가 끓고 있고 도넛모양의 채반 위에는 순대, 여러 부위의 수육이 정갈히 자리 잡고 있다.

제일 먼저 순대에 새우젓을 올려 한 입에 넣은 후 잔에 따라진 레드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적절히 간이 배어 있는 순대는 찹쌀과 선지의 농축된 풍미가 느껴진다. 템프라니요 품종의 와인은 잘 익은 과실향과 적당한 산도,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진다. 와인의 가벼운 맛이 입안에 남아있는 순대의 향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기름진 맛을 정리해 준다.

내가 와인을 마시는 마시는 모습을 흘끗 본 S가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랐다.

“차 가져왔다며?”

“대리.”

이번에는 머릿고기를 한점 접시에 올려 새우젓 두 마리와 들깨가 섞인 초장을 바르고 입안에 넣었다. 레드와인을 가져온 건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딩도어 밖으로 아까보다 거세진 비가 창을 두드렸다.

처음 나왔을 때보다 진득해진 육수를 한 수저 떠 입안에 넣었다. 혀끝부터 목구멍까지 깊고 고소한 국물이 스며들고 몸 안쪽이 따끈하게 덥혀진다. 오랜 시간 끓여낸 묵직한 육수는 온몸을 노곤노곤 풀어지게 만든다.

만족스러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S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에는 전시 꼭 보러 가자.”

“이제 체력이 살아났어?”

“응. 근데 졸려.”

S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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