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는데, 기대해도 좋아요.”
S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상자가 담겨있는 종이가방을 건넸다.
“뭐지? 너무 궁금하다. 설레는 기분으로 있다가 나중에 열어볼래.”
아끼는 초콜릿을 남겨 두듯 선물을 테이블 한켠에 놓고 메뉴판을 펼쳤다.
용산의 한식 주점이었다. 역에서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 십 분쯤 걸어가면 주택가 사이에 검은 차양과 나무 간살로 벽면이 장식되어 있는 어둑한 분위기의 가게가 나타난다. 유리문을 열면 주점 내부는 원목으로 된 일직선의 오픈 바 형태의 테이블이 전부이다. 자리는 만석이었지만 잔잔한 재즈음악과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소곤거리는 대화소리만 들려오는 무척이나 차분한 공간이다.
조금의 고민 끝에 애호박 가지롤과 아롱사태 냉채, 송이주를 주문했다. 검은색 셔츠를 입은 직원이 자그마한 달항아리 모양의 유리잔에 송이주 두 잔을 따른 후 애호박 가지롤을 테이블 위에 올려주었다.
석쇠에 구워져 동그란 모양으로 말린 애호박과 가지 안에는 베이컨, 크림치즈와 차이브가 들어있다. 애호박롤을 집어 한입 베어 먹자 부드러운 식감과 짭조름한 베이컨, 치즈크림과 차이브의 다채로운 식감이 입안에 머문다. 조심스레 음미한 후 향긋한 송이주를 한 입 들이켠다. 근래 경험해 본 식당 중 가장 만족스러운 경험이다. 감탄스러운 한숨을 내쉰 S가 말했다.
“여기 언니랑 꼭 가보고 싶어서 아껴두고 있었는데 그러길 잘했어요.”
“나도 오늘 네 덕분에 너무 행복해.”
동등이 고조에 이른 애정, 흔치 않은 식도락에 의한 쾌감. 지금이 타이밍이다.
빈 접시를 치우고 좌측에 밀어두었던 종이봉투를 앞으로 옮겨 박스를 꺼냈다. 선물을 받는 나보다도 흥분에 겨운 S의 표정이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민트색 상자를 열자 에스프레소잔보다는 조금 큰 사이즈의 주석과 유리로 이루어진 잔 두 개가 나타났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S에게 말했다.
“설마 이거 터키 홍차 잔이야?”
“역시 알아보시네요. 사실 저번주에 터키 여행을 다녀왔는데, 보자마자 언니 취향이다 싶었어요.”
찻잔 받침과 찻잔의 아랫부분에는 터키의 국화인 튤립을 형상화한 기하학적 문양이 장식되어 있고 안에는 마찬가지로 튤립 형태를 띤 유리잔으로 어우러져 있다. 화려한 금속 장식과 매끄러운 유리의 질감이 독특하고 이국적인 감상을 자아낸다.
바 테이블 앞의 한 뼘 높이의 선반은 진한 올리브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유리잔에 비친 푸른빛이 신비로운 느낌을 배가시켰다.
의례적인 리액션이 습관화된 나지만 진심으로 S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이거 정말 뭐야?”
“언니네 집에서 터키쉬 커피잔이랑 주전자를 본 적이 있어요. 깜짝 선물하고 싶어서 저 터키 다녀온 거 언니한테 비밀로 했잖아요.”
“그렇게까지? 하지만 잘했어.”
그녀의 선물에 유달리 감동을 받은 건, 터키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있어서다.
10년 전 뉴욕이었다. 홀로 떠난 여행이었고 아무런 계획 없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다 맨해튼에 위치한 첼시마켓에 가게 되었다. 첼시마켓은 공장을 개조한 거대한 식품시장이자 쇼핑몰이다.
수산물 마켓에서 갓 쪄낸 랍스터와 오이스터를 먹은 후 베이커리, 식료품점, 여러 소품가게를 구경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터키 용품점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각양각색의 양탄자, 모자이크 램프, 화려하기 그지없는 찻잔과 소품들. 홀리듯 문을 열자 중년의 터키인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고심 끝에 고른 것은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촛대였다. 긴 타원형의 유리에 터키의 전통문양이 새겨진 주석이 밑동과 윗부분을 받치고 있는 형태였다. 사장님께서 탁월한 선택이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보라색과 금박이 프린트된 작은 유리잔을 선물로 주셨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상상했을 우아한 유리잔이었다. 이 우연한 만남은 터키 문화에 대한 호기심의 불씨를 지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터키 문화원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그곳에서 접한 다채로운 강좌들은 나의 감각을 일깨웠다.
터키의 여러 가정식 요리를 배우기도 하고 커피 실습에서는 직접 끓인 터키쉬 커피에 장미로쿰을 먹기도 했다.
거실 한켠의 진열장에는 푸른색과 금박이 기하학적으로 어우러진 터키 주전자와 유리잔, 주석으로 장식된 커피잔이 진열되었다.
신비한 일이었다. 터키는 오로지 내 상상 속으로 만 존재하는 국가지만 작은 18평의 투룸에는 터키에 대한 동경, 집요한 아름다움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 그것에 대한 연모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닌 살아 숨 쉬는 기물로서 나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2022년부터 터키의 공식 명칭은 튀르키에로 변경되었다. 공식 명칭이 바뀐 것은 무척이나 합당하며 그리 부르는 것이 마땅하나 낯선 이들의 호의와 다정함, 그것에 더해진 관심과 깨달음, 애정하는 이의 뜻밖의 선물. 이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 나에게 터키라는 명칭은 가장 아끼는 책 속에 꽂혀있는 마른 꽃잎처럼,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사랑스러운 단어로 자리 잡아있을 것이다.
* 월간 에세이 2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