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민석훈 한 달 전에 상 치렀는데, 몰랐어?”
J가 최근 정치권에 연루된 동료에 대해 비통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했고 그보다 가벼운 얼굴로 민석훈이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말했다.
“몰랐어. 언제?”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대답했다. 주문한 지 삼십 분이 지난 술은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정확한 건 모르겠어. 나도 얼마 전에 들은 거라. 전시 일주일 앞두고 연락두절이 되어서 매니저가 집으로 찾아갔다가 발견했다던데 그 일로 미술관측이 꽤나 고생한 모양이야.”
“그럼 전시는 무산된 거야?”
“유서를 남겼는데 그림을 공개하지 말라는 한 줄만 적혀있었대. 파리에서 활동 그만두고 8년 만의 첫 전시라 주최 측에서 홍보를 많이 했다던데 불쌍하게 됐어. 나도 그림 그리지만 이런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뭐, 알 필요도 없지만.”
J가 테이블에 올려진 올리브를 집어먹으며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석훈은 2년 전 헤어진 애인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J는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바꾸었다. 새로 알게 된 스페인 식당에 대해, 며칠 전 만난 무례한 클라이언트와 최근 개봉한 유명 감독의 영화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웃고 떠들었다. 깊어지는 취기만큼 잠시 석훈을 잊었다. 자리를 옮겨 위스키를 시키고 평소보다 많은 술을 들이켰다.
인사불성이 되어버린 J를 택시에 태워 보냈다. 집까지는 15분 남짓한 거리였다. 가파른 힐 위로 취한 몸을 의지해 초겨울의 냉기가 들이치는 골목길을 걸었다.
건물 너머의 웅얼거리는 말소리, 알 수 없는 기계음소리, 바닥에 짓밟힌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뒤섞였다. 온갖 것들이 성마른 가지처럼 얽힌 거리 속에서 스스로가 타인처럼 느껴졌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수건 같은 몸과는 별개로 발밑의 구두굽이 일정한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현관센서가 고장 났는지 구두를 벗는 동안에도 집안은 어둑했다. 핸드백을 바닥에 던져놓고 어둠에 잠긴 거실을 바라본다. 유리에 스며든 불빛을 통해 집안의 물건들이 둔탁한 형체를 그리고 있다.
술에 취해서일까,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특유의 드라마틱한 질감 때문일까. 웅크리고 있던 감정들이 불어난 빛 더미 마냥 순식간에 밀어닥쳤다.
아주 천천히 긴 숨을 내쉰다.
예상치 못한 격렬함에 쓸려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석훈에 대해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