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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다 Jul 29. 2024

재의 고통 EP. 05

잔뜩 오른 취기 때문일까. 중간중간의 기억이 비어있다. 흔들린 채 길을 걷고, 택시를 타고 정신이 다시 명료해질 때는 이미 석훈의 집이었다.

갓 바른 페인트 냄새가 풍길 것 같은 흰 벽과 반듯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는 집은 짐작했던 만큼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가 손목을 가볍게 잡고 안쪽 방으로 이끌었다.

“여기가 작업실이에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빈 벽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붙여진 누드화였다. 그다음에는 유화물감냄새, 한쪽 벽면을 채운 책들, 갈색 가죽 소파, 바닥에 깔린 빛바랜 붉은 양탄자. 캔버스는 이젤에 걸린 채 등을 돌리고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벽에 붙은 프린트된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자 석훈이 말했다.

“어때요?”

“처음 보는 화가의 그림인 것 같은데 꽤 취향이에요.”

“희령씨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어요.”

잠시 만요. 라고 말한 석훈이 서랍 안에서 담요를 꺼내 소파에 펼친 뒤 나를 앉혔다.

“석훈씨 집에서 이런 방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지저분하죠? 여기는 희령씨 말고는 비밀이에요. 작업실은 어쩐지 깨끗하게 두고 싶지 않아서요.”

그가 장난스레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이중인격인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색하죠? 이럴 땐 술이죠.”

석훈이 책상에 올려져 있던 데낄라 한 병과 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지금 정신 차린 참인데 거절하기 힘드네요.”

석훈이 웃으며 테이블 위에 잔 두 개를 올려놨다.

“벽에 붙어있는 그림들은 전부 이 화가의 작품이에요.”

그가 건네준 빳빳하고 두꺼운 책장을 넘기자 거친 선으로 그려진 노골적인 그림들이 펼쳐졌다.

“누구인가요?”

“루시안 프로이드.”

“심리학자랑 이름이 같네요?”

“손자니까요. 얼굴을 자세히 봐 봐요. 어때요?”

“신기하네요. 유난히 피부가 울긋불긋해요.”

“제대로 봤어요.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루시안은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 거예요. 자, 내 손을 봐요.”

석훈이 얼굴 앞에 주먹을 내밀고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힘을 주니까 피가 몰리죠? 루시안은 이걸 그렸어요. 모델을 장시간 고통스러운 포즈로 세워둔 다든가 얼굴 옆에 화로를 두고 일그러진 표정과 열기에 울긋불긋해진 피부를 보이는 그대로 표현한 거죠. 대단하지 않나요? 저는 루시안의 이런 부분에 완전히 매료됐어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같던 석훈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일렁였다.

“상당히 가학적이네요.”

“마음에 들어요?”

“굉장히요.”

“역시.”

석훈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루시안 프로이드의 그림을 실제로도 본 적이 있나요?”

그가 내 앞에 서 무릎 위에 펼쳐진 화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그림을 처음으로 본 건 2008년 모마에서였어요. 그때는 학교를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처지라 사정이 넉넉지 않았어요. 오직 루시안의 그림을 보기 위해 전시 기간에 맞춰 뉴욕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모마 근처에 숙소를 잡았어요. 전시장에 들어가 그림을 본 순간, 생에 그런 강렬한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온몸으로 느껴지는 고통에 대한 감각이 도리어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줬어요. 뉴욕에 머무르는 내내 일어나면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종일 그림을 보고 나와 미술관 앞에서 담배를 태웠어요. 허기뿐인 몸을 연기가 태우고 있다는 감각이 내가 본 그림들과 함께하는 기분이었어요. 비워져 절대 채워질 리 없다는 여기던 갈증이 차오르고 있는 것만 같았죠.”

석훈이 눈을 반쯤 감은 채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리며 이어 말했다.

“르네 지라르의 책에서 이런 구절이 있어요. 대부분의 작품은 욕망의 진실을 감추거나 왜곡하고 있고 그런 작품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진실을 알려주지 못한다. 몇몇 작가들은 환상을 폭로하고 욕망의 진실을 보여준다. 인간은 스스로 무언가를 욕망할 수 없으며 타인에게서 욕망을 빌려온다고. 루시안 프로이드는 자신의 욕망을 감추지 않고 타인을 빌려 고통을 고스란히 투영했고 그의 그림을 본 후로 제 욕망은 루시안 프로이드로 가득 찼어요.”

“그렇다 해도 상당히 기묘하네요. 마음에는 들지만. 의도적으로 모델을 고통스러운 상태로 만들었다니, 사람들이 마치 재료처럼 느껴져요. 모델들을 그저 작업 도구로 여겼던 걸까요?”

석훈이 나를 바라본다. 그의 검은 눈이 유난히 가라앉아 보였다.

“루시안에게는 이게 그의 모든 것이었을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잠시간 말이 없던 석훈이 술을 비우고 대답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느껴져요. 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했을 거라고. 저는 그가 아니니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담담하게 말하는 석훈의 어조는 씁쓸했지만 눈빛에는 목적을 알 수 없는 흥분이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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