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다 Jul 31. 2024

재의 고통 EP. 06

창가는 완전한 어둠으로 잠겨있다. 방 안이 어두워지자 석훈이 스탠드를 켰다. 조명이 켜지자 집에 있는 물건들의 윤곽을 따라 길게 그림자가 졌다. 유리잔에 담겨있는 데낄라의 색이 선명해진다.

석훈도 취기가 올랐는지 예리하던 눈매가 한결 누그러져 보였다.

술잔을 반쯤 기울여 불빛이 비치는 주황빛 액체를 바라보다 그를 만나던 내내 위스키만 마셨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석훈씨 데낄라 좋아해요? 의외네요.”

그가 소리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까다로워 보이죠? 보기보다 많이 가리지는 않아요. 보드카만 빼면 다 잘 마셔요.”

“보드카는 왜요?”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취향에 안 맞아요.”

“말해줘요. 저도 당신 이야기가 궁금해요.”

“정말로 시시한 이유예요.”

석훈이 비워진 잔에 데낄라를 채워 나에게 건네줬다.

“파리에서 학교를 다닐 때였어요. 6년 정도 되었나. 그림이 너무 안 그려져서 마트에서 크래커와 물을 잔뜩 사 2주간 방에만 있었던 적이 있어요. 스스로를 가둔 거죠.”

“2주나 방에 만요?”

“네. 그래도 안 그려졌지만. 다섯 명이 살던 공동주택이었는데, 방에서 나오지 않으니 다들 걱정했었나 봐요. 결국 포기하고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파티를 열어줬어요. 웃으면서 술을 마셨는데 사실 정말 싫었어요. 그날 마신 술이 보드카였어요. 그 후로 보드카는 마시지 않아요.”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석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냈다.

“피워도 되나요?”

“네, 괜찮아요.”

그가 조금 텀을 두며 대답했다. 분명 싫어할 거라 생각했지만 모른 척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석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찻잔받침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 후로 그림은 그리지 않은 건가요?”

“글쎄요.”

그가 내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런 대화 없이 석훈과 나는 연거푸 술을 마셨다. 남겨진 취기에 데낄라가 더해져 양탄자의 얼룩진 유화 자국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손끝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진다. 석훈이 다시 내 손톱을 건드리고, 손바닥에 힘을 주어 지그시 누른다. 석훈의 손이 닿았던 손바닥이 희게 변했다가 서서히 핏기가 돌아왔다. 아마도 붉게 상기되었을 얼굴을 들여다보며 석훈이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가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와 남아있던 데낄라를 따르자 술병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주름진 흰색 물체가 잔에 담겼다.

“석훈씨, 이건 뭐예요?”

“애벌레예요.”

“진짜 애벌레요?”

“아가베 표면에 붙어사는 나비유충이에요.”

석훈이 호박 빛의 데낄라에 잠긴 애벌레를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마지막 잔 이에요. 마셔봐요.”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데낄라에 잠긴 뿌연 애벌레가 술잔의 파동에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석훈의 눈을 바라본 뒤 잔을 받아 한 입에 들이켰다. 이질감이 느껴지는 덩어리가 뜨거운 액체와 함께 목구멍 너머로 넘어갔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석훈이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말없이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눈앞의 모든 것이 일렁였고 아랫배가 뜨겁게 타올랐다. 서서히 내려간 뱃속 안의 유충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가 내 얼굴 앞에 주먹을 내밀며 말했다.

“보여요?”

그는 움켜쥐고 있던 주먹에 더 힘을 줬다.

“보이나요?”

굴곡진 손바닥에 서서히 붉은 피가 몰렸다.

“난 이걸 그리고 싶어요.”

내 눈을 바라보며 움켜쥔 손에 더 힘을 준다. 주먹을 파고드는 손톱은 보이지 않는다. 잠시 숨을 멈추었다. 뱃속 안의 유충이 날개를 파닥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미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전 05화 재의 고통 EP. 05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