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훈의 집으로 가는 건 대부분 주말의 오후 3시경이었다. 옷을 테이블에 걸쳐두고 벌거벗은 채로 소파에 누우면 그가 닫혀 있던 창을 열었다. 대낮의 햇빛이 방 안을 채우고 부유하는 먼지와 석훈의 머리끝이 밝게 빛났다.
그날따라 모든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방안을 채운 사물, 벗은 나와는 달리 목 끝까지 채워 잠근 석훈의 셔츠, 서늘한 시선, 서걱거리는 연필소리. 창 너머에서는 아이들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달라붙은 시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새삼스레 부끄럽게 느껴져 소파 위에 걸쳐진 천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석훈이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배고프지 않아요?”
“배고프지 않아요.”
“정말로요?”
“이렇게 벗고 뭘 먹겠어요.”
천을 조금씩 몸 위로 덮으며 대답했다. 의자에서 일어선 석훈이 다가와 얼굴을 어루만졌다.
“희령씨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워요.”
불안함인지,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흥분인지 모를 마음으로 서늘한 얼굴을 올려다봤다.
“지금 좋아요, 희령씨. 그대로 있어요.”
석훈이 시선을 내 몸에서 캔버스로 옮겼다.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급한 손놀림이 느껴졌다.
“추워요. 따뜻한 커피 한 잔 가져다줄래요?”
그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캔버스에 시선을 고정했다.
“석훈씨, 커피.”
흰 캔버스에 먹물을 뿌리듯 다시 한번 말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멈춘다. 석훈의 기대감을 깨뜨리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이제는 내가 그를 바라본다. 움직임이 멈춘 어깨와 팔을, 굳어진 얼굴을. 석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서야 희미하게 느꼈던 것 같다. 석훈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퍼져가는 긴장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자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하죠.”
석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밖으로 나갔다. 열린 문 너머로 가스불이 켜지는 소리와 물이 끓는 소리에 이어 커피 향이 퍼졌다. 소파에 걸쳐져 있던 가운을 걸치고 그가 없는 캔버스 뒤편을 바라봤다.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비집고 나왔다.
그가 지친 얼굴로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중간에 방해해서 실망했나요?”
석훈이 테이블 위에 있던 위스키 병을 집어 들어 뚜껑의 껍질을 벗겨내고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희령씨는 잘하고 있어요.”
잔에 따라낸 위스키 한 잔을 비워내고서야 석훈이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좀 피곤하군요.”
“나는 누워있고 석훈씨는 계속 그림을 그렸으니까요.”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석훈이 목이 마른 듯 다시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가 건네준 위스키 잔을 받아 옆으로 밀어 놓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금세 차갑게 식어있다.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영화는 어때요?”
석훈이 벽 한편에 설치된 스크린을 내리고 빔프로젝터를 켜며 말했다.
“좋아요. 이미 뭘 볼지 결정한 것 같은데.”
“제가 좋아하는 영화예요. 베니스에서의 죽음. 혹시 보셨나요?”
“아뇨.”
“토마스 만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예요. 말러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극에 달해있는 작품이죠.”
청회색빛 바다를 배경으로 한 처연하고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말러의 음악이 내내 이어졌다.
조용히 영화를 보던 석훈이 말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에요.”
주인공인 구스타프 아센바흐와 친구가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스크린 속에서 구불거리는 갈색머리에 안경을 낀 교수가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앉아 말했다.
‘건강하다는 것은 얼마나 건조한 일인가? 특히 신체가 아니라 영혼의 경우에 말이야.’
남자의 대사가 끝나자 석훈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통이 없는 인간의 존재는 무의미해요.”
석훈의 얼굴에 스크린의 푸른빛이 비쳤다. 잔상을 쫓아 그를 바라봤지만 석훈은 다시 무감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영화는 비극적이었다. 아센바흐의 열망은 조금도 닿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아름다움을 지켜본다. 그저 무력하게.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석훈은 내내 말러의 아다지에토를 틀어 놨다. 그의 시선이 벽면의 포스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영화 속 교수의 대사와 루시안 프로이드의 그림이 혼몽하게 뒤섞였다.
“석훈씨도 루시안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나요?”
여전히 그림을 바라보며 석훈이 대답했다.
“루시안이 고통을 육체를 통해 표출했다면 저는 내면에 가라앉아있는 고통을 끄집어내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그 사람의 영혼을 말이죠.”
고개를 소파에 기댄 석훈이 눈을 감았다.
“석훈씨, 취했어요?”
“조금요.”
“그럼 이번에는 석훈씨가 솔직해질 시간이에요.”
“저는 희령씨에게 항상 솔직해요.”
“그럼 제 말에 전부 대답해 줄 건가요?”
석훈이 눈을 감은 채로 미소 지었다.
“뭐가 궁금해요?”
“석훈씨는 파리에서 어떤 그림을 그렸어요? 이야기해 줘요.”
가만히 눈을 뜬 석훈이 자신의 발끝 언저리를 바라봤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그가 대답했다.
“지렁이요.”
“지렁이요?”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이었을 거예요. 할머니 댁이었어요. 3살 터울이 나는 사촌형과 시골길에 있었죠. 양쪽에 논밭이 있고 그저 흙뿐인 시골길. 비가 내린 후 이었는지 바닥은 온통 진흙으로 질척이고 있었는데 빗물에 쓸려온 큰 지렁이 한 마리가 있었어요. 사촌형은 지렁이를 사정없이 밟아댔어요. 저는 그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기절을 했었다 해요. 일주일간 머릿속에 지렁이가 밟혀가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아 쉬지 않고 울었어요. 차츰 진정이 됐지만 기억 어딘가에 깊은 홈처럼 남아있었죠.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며 인기도 얻고 인정도 받았지만 어딘가 비어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지렁이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아마 몇 천 장을 그렸을 거예요. 캔버스에 물감을 덧칠하고 덧그리며 쉬지 않고 지렁이만 그리고 또 그렸어요. 우습게도 그릴수록 거대한 검은 형상만 남았죠. 전부 타버리고 남은 재처럼. 검은 물감으로 뒤덮인 캔버스를 바라보며 그림을 더 그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왜죠?”
“지렁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