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훈은 내 덕분에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한 번도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지 않았다. 집요한 조름에도 희령씨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했지 못한다는 대답을 반복할 뿐이었다.
당시에는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 나를 깊이 욕망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무엇을 향한 집착인지도 모른 채로.
석훈이 처음으로 화를 낸 건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다시금 이야기했을 때였다. 일요일 오후 햇빛을 받으며 여느 때처럼 나를 그리던 석훈이 무심히 질문을 던졌다.
“희령씨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해 줘요.”
반복된 질문은 대답을 간소하게 만들었다.
“사랑했었던 분들이고 몇 개의 기억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고 있지만.”
덤덤한 목소리를 들은 석훈이 격양된 음성을 내뱉었다. 지나칠 정도로 낯선 모습이었다.
“아직도 나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나요? 왜 전부를 보여주지 못하는 거죠. 상처를 어째서 숨기고 있는 건가요?”
석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재차 물었다.
“모르겠어요.”
“당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으면 그림은 채워질 수 없어요.”
그의 분노에도 모르겠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정말로 모르겠으니까. 느껴지지 않는 고통을 어떻게 고해성사하듯 말할 수 있을까.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석훈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입에서 허공으로 기가 차는 듯 한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애초에 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내고 뻔뻔하고 무지한 사람을 바라보는 양 행동하는 그를 보니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대체 나에게 뭘 가져가고 싶은 걸까.
그 후로 석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대했다. 아니, 또 다른 챕터를 넘기듯 다른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술을 마시는 시간이 늘어났다. 함께 있는 동안 항상 그의 손에는 위스키가 들려있었고 만나지 않는 시간 동안 얼마만큼의 술을 더 마실지는 모를 일이었다.
담백하다 못해 바스락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던 태도가 바뀐 것도 그즈음이었다. 정성껏 화분에 물을 주듯 이전에 없던 애정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희령씨는 나의 모든 것이에요. 저도 당신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건 처음이에요. 당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끊임없이 그가 속삭였다.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는 구애는 충만함 대신 의문을 더해주기에 충분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수 없이 그의 앞에서 벌거벗고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석훈은 단 한 번도 나와 몸을 섞은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