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복기하듯 되짚어보면 실소가 나올 정도로 뻔한 것임에도 당시에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 의식해 버렸음에도 알고 싶지 않은 것들. 직전에 다가와도 눈을 감아버리고 말아 버리는.
그날 이후로 석훈은 쉬지 않고 내 얼굴을 그렸다. 미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몰입해 있는 모습은 마음속에 묘한 충족감을 피어오르게 했다.
작업실 안 가득 붙어있는 루시안 프로이드의 모델들처럼 얼굴 앞에 화로를 놓지도 고통스러운 포즈를 취하지도 않은 채 푹신한 소파에 편할 대로 누워있는 것으로도 그는 만족했다.
커튼이 달리지 않아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밝은 방 안에는 좁은 공간을 채운 진득한 유화냄새와 그의 낮은 목소리,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독한 술만이 존재했다. 쿠션에 파묻혀 캔버스 너머 석훈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른한 음성에 끝없이 대답했다.
“전부 말해줘요, 희령씨에 대한 건. 당신의 모든 걸 알고 그대로의 희령씨를 그리고 싶어요.”
“어떤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이렇게 말 많이 한 건 처음이에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정말로.”
붓질을 멈추고 얼굴을 바라보던 석훈이 말했다.
“희령씨 부모님 이야기를 해줘요.”
“부모님이요?”
“네,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듣고 싶어요.”
“뻔 한 이야기예요.”
석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뻔할 리가 없잖아요? 희령씨 나이에 두 분 다 돌아가셨다는 건. 남들은 당연하다 생각하는 게 결여되었는데 괜찮을 리 없죠. 희령씨는 나를 못 믿나요?”
느닷없는 어투에 놀라 그를 바라보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석훈이 황급히 붓을 내려놓고 나에게 다가왔다.
“미안해요. 날 믿어줘요. 희령씨는 모를 거예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원하고 알고 싶어 하는지.”
지독히 가라앉은 석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뱃속이 간지러웠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위스키를 들이키자 뜨거운 알콜의 기운에 뱃속의 진동이 가라앉는다.
“부모님과 사이는 나쁘지 않았어요. 그림처럼 화목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저에게는 괜찮은 분들이었어요. 제가 24살 때였고, 부부동반 모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였어요. 다행이라고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대학을 졸업한 직후였고 남겨두신 재산이 꽤 있었어요. 분명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느꼈었는데 이제는 그때의 감정이 희미하게 느껴져요.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이요.”
간결하다면 간결하다 할 수 있는 대답에 그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희령씨의 밑바닥에 있는 고통까지도.”
이상한 말이었다. 방금 전의 대답이 가지고 있는 감상의 전부였다. 소진되어 남아있지 않은 슬픔을 연기라도 하길 바라는 걸까. 모든 것을 내뱉어 낼수록 석훈은 솔직하지 않다는 불신을 더해가는 것 같았다.
순순히 그가 따라준 위스키를 마시며 생각했다. 나조차 알지 못하는 밑바닥은 과연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