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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다 Jul 24. 2024

재의 고통 EP. 04

귀찮아 죽겠다는 자세로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J의 설명에 따르면, 유학시절 학교 선배였던 석훈은 파리에서 주목받는 신예였다 했다. 돌연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는 바가 없으며 지금은 미술사 강의를 하거나 관련 서적을 집필 중이라는 정도의 인물소개란 같은 몇 줄이 그에 대해 전해 들은 전부였다.

석훈과는 그날 이후 서너 번의 술자리를 가졌다. 그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언제나 본인의 개인사와는 상관없는 말만을 읊조렸기 때문에 참지 못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는 건 내 쪽이었다.

바텐더가 위스키 두 잔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소리 없이 잔을 들어 움직이는 그의 길고 마른 손가락을 바라봤다. 결벽적으로 바짝 깎인 손톱이 어딘지 위태로운 느낌을 주었다.

석훈의 목소리는 낮았고 신중히 단어를 골라 말했지만 조용한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게 닿는 시선은 다른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하면서도 무언가를 깊고 치밀하게 눌러내고 있는 눈이었다.

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킨 석훈이 말했다.

“J씨에게 희령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요?”

“단편적인 부분 만요. J씨는 말이 많은 편은 아니더군요.”

“그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도 그래요.”

“저는 듣는 걸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희령씨가 궁금하니 더 그래요.”

긴장으로 뻣뻣하던 목이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표정을 정리하며 그에게 대답했다.

“이미 많이 말해버린 것 같은데.”

“아직 한참 부족하죠. 술을 더 주문해야겠네요. 어떤 걸 좋아하세요?”

“잘 몰라요. 추천해 주시는 걸로 마실게요.”

“부드러운 걸로 골라야겠네요.”

석훈이 잔을 정리하고 있던 바텐더에게 아드벡 코리브레칸을 주문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상당히 악취미인 남자라고 생각했다.

위스키를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던 석훈이 말했다.

“어떤가요?”

“좋네요.”

“이런 말 뜬금없지만 저는 희령씨가 마음에 들어요.”

“그런가요?”

시간이 늦어지자 한산하던 바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테이블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석훈과 나는 계속해서 위스키를 마셨고 긴 시간 동안 그는 한 번도 존칭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희령씨는 혼자 사는 건가요? 본가가 어디예요?”

“저는 본가가 없어요.”

“무슨 뜻이죠?”

“부모님이 안 계시거든요. 혼자산지 꽤 됐어요.”

“아, 그렇군요.”

어떠한 동정심이나 위로도 없이 석훈이 대답했다. 무심함이 기저에 깔려있던 눈빛에 언젠가 느꼈던 집요함이 담기기 시작했다.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바라보던 석훈이 갑작스레 말했다.

“희령씨 얼굴이 그리고 싶어 졌어요. 지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나에게 석훈이 스치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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